동북아역사재단(이사장 정재정)은 오는 10일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대학교(The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 이하 UBC)와 공동으로 동 재단에서  '임진왜란의 전개와 명의 대응'이라는 주제로 워크숍을 연다.

노영구 국방대학교 교수가  ‘임진왜란 전후 조선과 일본의 전술 변화 양상’이라는 주제로 발표한다. 노 교수는 임진왜란을 계기로 조선과 일본이 군사제도와 전술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왔다고 밝혔다.

아래는 발표문 전문이다.

1. 서론

16세기 후반 일본의 조선 공격으로 시작된 동아시아 세계대전인 임진왜란은 군사사적인 측면에서 일본과 조선의 군사 제도와 전술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온 큰 사건이었다. 유럽에서 도입된 신형 화승총인 조총(철포)으로 무장한 일본군의 공격에 기존의 전술로 대응한 조선은 초기 전투에서 큰 어려움을 겪었다. 이 전쟁에 조선을 구원하기 위해 참전한 명나라 군도 일본군의 조총 공격에 적지 않은 피해를 입었다.

한편 일본군의 경우에도 각종 화기를 동원한 명나라 군의 공격과 조선의 기병 공격 등에 큰 피해를 입는 등 임진왜란에 참전한 주요 국가 모두 상대로부터 적지 않은 자극을 받았다. 특히 명군과 일본군으로부터 큰 피해를 겪었던 일본과 조선은 전쟁 이후 기존의 군사 편제와 전술 전반에 변화가 불가피하였다.

그동안의 한일의 군사사 연구에서는 아직 근세의 군사제도 변화나 戰法 등에 대한 본격적인 고려는 아직 충분하지 못한 실정이다. 특히 주요한 군사적 전환점이라고 할 수 있는 임진왜란 전후의 변화 양상에 대해 주목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다.

군사상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보면 임진왜란 전후의 변화는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보다 매우 그 진폭이 컸음을 알 수 있다.

본 발표문은 임진왜란 전후 조선과 일본의 군사상의 변화를 군사 편성과 전술의 측면에서 살펴보고 그 특징과 상이점, 그리고 전략문화에의 영향을 도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2. 임진왜란 전후 일본의 군사적 변화

근세 일본의 전술 변화에서 가장 주목되는 요소로 지목되는 것이 철포의 도입과 이에 따른 전투 양상의 변화를 드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철포의 사용이 전술과 전략에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는지에 대해서는 최근 논란이 적지 않다.

실제 전체 군사의 구성에서 철포의 낮은 비중 문제를 들 수 있다. 철포를 이용한 가장 대표적인 전투로 알려진 장소합전(1573) 직후인 1575년 상삼겸신의 「군역장」에 의하면 39인의 家中의 武將이 거느린 군사 5,514명 중 장창병은 3,609명, 철포병(철포지) 321명, 기수(대소기지) 368명, 기병 566명, 그리고 각종 잡병(수명) 650명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즉 당시 전체 군사에서 철포병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6%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이에 비해 장창병은 65% 이상을 차지하고 있고 기병의 비중도 10% 이상임을 고려한다면 16세기 후반 일본의 전술이 철포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다음으로 일본 철포의 방어적 속성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일본의 철포는 安全性과 조작성은 떨어지지만 명중의 정확도가 높았다. 이는 명중의 정확도는 떨어지지만 안전성과 조작성이 높아 평원에서의 보병의 집단 전투에 적합한 유럽형의 치륜총, 수석총과는 차이가 있었다. 따라서 철포 도입 이후 일본의 야전 전술에서 한 동안 철포가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다만 전국시대 후반기 들어 야전에서 철포가 위력을 발휘하면서 전투원의 피해가 급속히 커지고 있음은 주목되는 현상이다.

임진왜란 초 일본군의 편성과 전술 양상은 전쟁에 참전하였던 일본군의 구성을 통해 짐작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전국시대 직후에 일어난 조선과의 제1차 전쟁(임진왜란) 당시 풍신수길이 고교종무, 고교통호 형제에게 부과한 군역 내용을 보면 총 인원 3,000명 중에서 전투원은 1,400명으로서 구체적으로 보사, 기사가 각각 150명, 철포족경이 200명, 궁족경이 100명, 창족경이 500명 등이었다. 따라서 철포의 비중은 궁의 2배 정도로서 이전보다 상당히 증가하고 전체 전투원 중에서 14% 이상이었다.

그런데 조선과의 제2차 전쟁(정유재란) 시기 같은 형제에게 부과된 군역에서는 궁병과 철포병의 비율이 1 : 3.8로 철포의 비중이 2배 가까이 급격히 높아지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5~6년의 짧은 시기 동안 급격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철포의 비중은 계속하여 급격히 높아져 임진왜란 직후인 1600년 일본의 패권을 놓고 벌인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동북 지방 대명인 이달정종가 보낸 3천 군사 중에서 기병 420명 등을 제외한 보병 전투원 2,300명 중 철포兵이 1,200명에 달하여 전체의 절반을 상회하였다.

급격한 변화의 원인은 일본군이 이 전쟁에서 겪었던 전술적 어려움이 일본군의 鐵砲 확대와 전술 변화를 가져온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임진왜란 시기 야전에서 일본군은 조선에 참전한 명나라 기병대의 돌격에 무척 고전(苦戰)하였다. 명나라 기병은 창검만으로 무장한 것이 아니라 각종 火砲, 화전의 지원을 받는 중무장 형태의 기병이었다. 보병의 경우에도 대형 화포와 철포와 호준포 등 경량 화기 등으로 무장하여 화력 면에서 일본군을 능가하였다. 이 전쟁의 주요 국면을 전환시킨 전투의 경우 명군의 화력 우위가 전투를 결정지었다.

궁병의 비중이 줄어들고 철포의 비중이 높아진 것은 명군의 화력 우위와 함께 기병의 돌격을 저지하기에 궁시가 가진 한계가 드러났기 때문이다. 당시 철포는 관통력이 뛰어나고 사정거리도 멀었지만 발사 속도가 궁시에 비해 늦고 악천후에서는 사격하기 어려운 취약점이 있어 상당한 규모의 궁병과 함께 편성할 필요성이 있었다.

그러나 갑주로 보호된 기병의 돌격을 저지하기에는 관통력의 문제가 있었다. 이에 비해 화승총은 탄환의 속도는 매우 빨라 명중할 경우 갑옷을 입은 신체의 관통 이후에도 신체 내부에 치명적인 상처를 주어 적군을 완전히 무력화시킬 수 있었다. 이 전쟁의 경험은 이후 일본의 군사제도 및 전술에 큰 변화를 주게 된다.

3. 임진왜란 전후 조선의 전술 변화

16세기 후반까지 조선은 북방 여진족의 침입이 가장 주요한 위협이었으므로 기병을 중시한 편제와 기병 돌격과 활쏘기(궁시)와 화약 무기 중심의 전술 체계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근접전을 위한 전술과 무기체계를 적절히 갖추지 못하였다.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의 패배는 대도와 장창 등 기존의 근접전 능력에 더하여 신형 화기인 철포로 무장한 일본군의 전술적 우위에 따른 것이었다. 이에 조선은 명나라의 새로운 전술로 16세가 중반 척계광이 개발한 이른바 절강병법을 도입하였다.

이 전술은 각종 화포와 화전을 이용하여 먼 거리에서부터 기선을 제압하고 이어 새로운 근접전 병기인 방패, 장창, 당파, 낭선 등을 이용하여 근접전을 벌이도록 한 보병 중심의 전술체계였다. 전쟁 중 이에 적합하도록 조선의 군사제도는 완전히 변화하였다.

절강병법은 전체 군사에서 철포병의 비중은 20% 정도이고 나머지는 살수였다. 궁병은 따로 배치된 것이 아니라 장창병이 궁을 가지고 있다가 필요시 사격하도록 하였다.

이 전술은 기병을 별도로 편성하지 않은 보병 중심의 전술이었다. 이는 조총이 점차 대규모로 사용되는 전쟁 양상의 변화와 관련이 있다. 먼저 임진왜란 중 일본의 철포에 깊은 인상을 받았던 조선은 포수(=철포병)을 양성하는 데 노력을 기울였다.

아울러 살수의 훈련을 보급하는 데 노력하였다. 다만 기존의 장기인 궁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군사인 사수도 남겨두도록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은 사수, 살수, 포수를 중심으로 군사를 양성하되 17세기 초 후금의 침입 우려로 인해 기병을 추가로 육성하고 여러 병종을 통합한 전술을 고안하여 후금(청)에 대항하려 하였다.

17세기 중반 일어난 청과의 전쟁(병자호란, 1636)은 조선의 기존 전술의 장단점이 여실히 드러났다. 가장 큰 영향은 기병의 돌격을 저지하기 위해서는 철포가 궁시보다 매우 우수하다는 점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17세기 중반 이후 사수를 포수로 전환하면서 사수의 비중은 급격히 줄어들고 포수의 비중이 급증하기 시작하였다. 병자호란 직후가 되면 조선군 보병 전체에서 포수의 비중이 그 이전 20% 정도에서 50%를 훨씬 상회하기 시작하였다. 가벼운 야전용 화포의 제작이 시도되었고 이를 담당하는 부대가 창설되었다.

포수가 전투의 주요 병종이 되면서 이전의 여러 형태의 殺手는 규모가 급격히 축소되고 창검병으로 통일되는 양상을 보였다.

4. 맺음말 - 조선과 일본의 전술적 상이점과 전략문화에의 영향

조선은 청과의 전쟁 이후에도 계속 청으로부터의 군사적 압박을 받았다. 따라서 다양한 화기를 중심으로 군사력을 완전히 재편하고 아울러 기병 강화에도 계속 노력하였다. 즉 군사적 긴장이 계속 유지되었다.

이에 비해 일본은 17세기 전반기 오사카의 진(大坂の陣) 시미하라의 난( 島原の亂) 이후 대규모 전쟁을 겪지 못함에 따라 17세기 초반 야전 전술과 군사조직의 여러 변화가 나타난 이후 큰 변화는 나타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전술적인 변화는 나타났지만 궁과 장창이 상당한 비중으로 잔존하고 있음은 이를 반영한다. 다만 18세기 후기 해양으로부터의 대외적 위협이 발생하자 보병 전술의 개혁보다는 대포의 제조와 포병 확장을 통해 해양으로부터의 위협에 대처하고자 하였다. 강호시대에 완만하나마 확장되었던 병종이 포병이라는 사실은 이를 반영한다.

대륙과 해양이라는 위협의 상이는 두 나라의 이후 전략문화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게 된다. 즉 조선의 경우에는 육군 중심의 전략을 바탕으로 야전 전술에서의 다양한 요소, 즉 화력과 기동을 함께 중시할 뿐만 아니라 수세성과 함께 공세성을 고려하는 전략문화가 나타났다.

이에 비해 일본은 육전의 경우에는 화력을 우선하는 양상을 띠게 되고 대신 해군의 강화를 중시하는 전략문화가 나타난 것은 17세기 중반 이후 두 국가가 지난 역사적 경험의 상이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