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말과 언어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인간이 만든 발명품 중에 손꼽을 수 있는 것이 언어이다. 우리는 언어가 만들어짐에 따라 서로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되고 인류의 모든 지식과 역사를 후손에게 물려 줄 수 있었다. 이런 점에서 언어는 매우 유용한 수단이 된다. 우리는 어떤 말을 사용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인격과 성품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자기가 어떤 단어와 말을 쓰느냐에 따라 자기를 돋보이게도 하고 남들과 다르게 보인다고 생각한다. 말은 한 번 내뱉게 되면 다시 담을 수 없다. 요즘에는 여러 통신 수단에 의해 말과 언어가 전파가 되어 아무런 제약도 없이 무한대로 퍼져 나가게 된다.

▲ 서호찬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대학교 교수

예전에 편지를 쓸 때에는 여러 생각을 하면서 받는 사람의 뜻을 살피면서 글을 썼다면, 지금은 아주 쉬운 통신수단을 활용하기에 깊이 생각하지 않는 쓰는 경향이 있다.
말과 언어는 인간이 만든 체계로 사용되고 있지만 이 말과 언어에 얽매이고 구속이 되고 있다. 말을 너무 많이 하기 때문에 손해를 보는 경우도 있고 논리와 경우에 따져서 얘기를 할 때는 자기 논리에 빠져 남에게 강요하게 된다. 자기 말에 빠져 다른 사람과 공감이 안 될 수도 있고 대화의 단절이 되고 서로의 벽을 쌓는 경우도 있다. 소통에 도움이 되는 말과 언어가 아니고 역설적으로 다른 사람들과 공감을 이룰 수 없는 말과 언어가 된 것이다.

道可道非常道(도가도비상도) 名可名非常名(명가명비상명)

노자(老子)의 첫 장에 나오는 구절이다. 도를 도라고 말하는 도는 항상 도가 아니고, 이름을 이름이라 붙이는 것은 항상 이름이 아니다. 즉 우리 머릿속에 있는 것을 말을 하게 되면 그것은 진정한 의미가 될 수 없고 관념적인 개념이 된다는 것이다. 말과 언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관념적이 요소가 있기 때문에 그것이 진정한 뜻과 의미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필자가 “의식”이란 말을 하면 필자가 생각한 의식의 정의와 독자가 생각하는 의식의 뜻과 의미는 다를 수 있다. 그럼 진정으로 우리의 마음을 전달하는 수단은 무엇일까?
필자는 세도나 여행을 한 적이 있다. 세도나 여러 곳에서 명상을 하였지만 벨락에 앉아 명상을 한 기억이 내 마음 속에 남아 있다. 명상을 하면서 도시의 소음과는 다르게, 새소리와 바람에 흔들이는 나뭇잎 소리, 심지어는 벌레 소리까지 내내 경청할 수 있었다.

그들은 비록 인간과 같이 언어 체계로 나에게 말을 건네지 않았지만 나는 그들이 무엇을 얘기하는지 알 수 있었다. 어떤 말과 언어가 아니더라도 나에게 감동적인 메시지를 전해 주었다.
인디언들은 말을 하지 않아도 서로가 통하는 공감능력이 뛰어났다고 한다. 인디언의 예를 빌리지 않더라도 사람들은 고유의 감각이 살아 있으면 굳이 말을 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알 수가 있다.
여러 말과 언어의 홍수인 지금, 우리의 감각은 내부가 아닌 외부로 향해 있어 진정으로 다른 사람들의 마음을 알아채지 못한다. 이제는 외부로 향해 있는 감각을 내부에 집중함으로써 사람과 사람과의 소통, 자연과의 소통, 우주로부터 내려오는 메시지를 받아야 하고 귀 기울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