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8월 29일은 경술국치일로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 부끄러운 날이다. 이보다 317년 전, 전장으로 떠나는 아들을 향해 "어서 가서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는 한 어머님의 당부가 있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가 한 당부이시다.
나라의 치욕은 이미 1592년의 임진왜란으로부터 시작되었고, 1636년 병자호란에 이어 1910년 경술국치, 1950년 6.25 동란으로 끊임없이 이어져 오고 있다.

이순신 장군의 어머니 초계 변씨(1515-1597)는 1593년부터 5년간 전라좌수영 본영(여수) 근처인 고음천에 옮겨와 계셨다. 장군은 수시로 군관을 보내어 안부를 전해드리며 "이때가 가장 행복했다."고 술회하신다. 『난중일기』를 본다.
갑오년(1593년) 1월 초 1일 "비가 퍼붓듯이 내렸다. 어머님을 모시고 함께 한 살을 더 하게 되니 이는 난리 중에도 다행한 일이다." 그로부터 꼭 열흘 뒤, 장군께서는 마침내 여수 본영으로부터 배를 띄워 어머니를 뵈러 간다.

"흐리되 비는 오지 않았다. 아침에 어머니를 뵈려고 배를 타고 바람 따라 고음내(현, 여천시 시전동 웅천)에 도착하여 밤 10시쯤 어머님 앞에 엎드렸다. 어머니께 가서 뵈니 어머니는 아직 주무시고 계셨다. 큰 소리로 부르니 놀라 깨어서 일어나셨다. 숨을 가쁘게 쉬시어 살아 계실 날이 얼마 남지 않으신 듯하니 감춰진 눈물이 흘러내릴 뿐이다. 그런데 말씀하시는 데는 착오가 없으셨다."

이순신 장군께서는 생사가 경각에 달린 싸움터에서도 언제나 태산 같으신 분이다. 그런데도 오십이 다 되가는 장군이 곤히 주무시고 계신 팔순이 다 되신 노모를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큰소리로 부르신다. 순간적으로 나이, 직위, 밤낮을 잊고 마치 학교 다녀 온 어린아이처럼 ‘엄마’를 크게 찾으신다. 백발을 뽑는 이유가 늙으신 어머님께 민망하기 때문이라는 초로의 장군은 여전히 어머님의 품을 그리워하는 아들일 뿐이었다. 두 분은 밤새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셨으리라. 다음날, 아침상을 물리고 ‘적을 토벌하는 일이 급하여 오래 머물 수가 없기에’ 어머님께 인사를 올린다.

"아침에 어머님께 하직을 고하니, 잘 가거라.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 하고 두 번 세 번 타이르시며 조금도 이별하는 것을 탄식하지 아니하셨다. 장군의 어머님께서는 생사를 기약할 수 없는 전쟁 중임에도 무부인 아들과의 이별은 담담하게 받아들이면서도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라."는 당부는 두 번 세 번 되풀이 하신다. 그냥 ‘치욕을 씻으라’고 당부하신 것이 아니라 “크게 씻으라.”고 거듭 거듭 강조하신다. 어머님 또한 조선의 한 백성으로서, 한 아들의 어머니로서 당신의 아들이 ‘장군으로서의 소임을 크게 하라’는 간절한 소망을 가슴으로부터 토해 내신 것이다. 어머님이 82세 되던 병신년(1596년) 10월 7일에 본영에서 수연 잔치를 차려드린 것이 그 어머니와 그 아들의 마지막 만남이 된다.

조선이 제외한 채 진행하던 명과 왜의 휴전 모의가 결국 깨진다. 격노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정유년(1597년) 재침을 감행한다. 왜군의 반간계에 걸려든 선조와 조선 조정에 의하여 이순신 장군은 옥에 갇혀 숱한 고통을 받는다. 전쟁은 다시 급박해지고 정탁의 ‘신구차’ 등, 조야의 간절한 구명운동으로 4월 초 1일, 장군은 간신히 선조의 마수로부터 풀려난다. 반년 만에 다시 계속된 『난중일기』에는 "옥문 밖으로 나왔다. 울적한 마음 한층 이기기 어렵다."고 적혀 있다. 장군의 어머니께서도 아들의 출옥소식을 듣고 여수의 고음천에서 고향 아산까지 뱃길로 올라오시니 이미 83세의 노구이시다. 뱃사공의 만류에도 기어이 배에 오르시지만 여수를 떠난 배가 공교롭게도 법성포에서 6일간 표류하다가 간신히 구조되어 겨우 태안의 안흥량까지 온다. 이 소동 중에 장군의 어머님께서는 건강이 악화되나 오직 아들을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버티시다가 결국 배에서 돌아가신다. 장군은 미처 이 사실을 모르신 채 그리운 어머님을 맞이하러 아산의 해암포로 나와 기다리신다.

▲ 이순신 장군의 화살. <그림=원암 장영주 작>.

그날의 『 난중일기』이다.
정유 1597년 4월 12일 맑음. "일찍 식사 후 어머님을 마중하려고 바닷가로 나갔다. […] 얼마 후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부고를 전했다. 뛰쳐나가 가슴을 치며 슬퍼하니 하늘의 해조차 캄캄하였다. 바로 해암(현, 아산시 인주면 해암리)으로 달려가니 배는 벌써 와 있었다. 길에서 바라보니 가슴이 찢어지는 슬픔을 이루 다 적을 수가 없다. 뒷날에 적었다.(追錄草草)"
같은 해, 4월 19일. 장군은 미처 상도 치르지 못하고 금부도사의 재촉으로 남쪽으로 떠나신다. "맑다. 일찍 길을 떠나며 어머님 영 앞에 하직을 고하고 울며 부르짖었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간에 나 같은 사정 또 어디 있을 것이랴. 어서 죽느니만 못하다."

장군이 이러한즉 백성은 오죽하랴. 임진왜란 당시 백성들 사이에는 "왜군은 얼레빗, 명군은 참빗"라는 속담이 생겼다.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베푼다는 명군의 약탈이 조선백성들에게는 적보다 더한 고통의 직격탄이 되었다. 그러나 서애 유성룡의  술회처럼 명군의 참전 시에 약속했던 군량미를 제때 공급할 수 없었던 조선조정의 탓이 컸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38년 뒤, 조선의 인조는 삼전도에서 청나라에 무릎을 꿇는다. 비공식적 집계에 의하면 조선 백성 40만 명은 포로가 되어 청나라의 심양과 몽골로 끌려간다. 이때 속환되어온 부녀자들을 ‘환향녀’라고 하니 ‘화냥년’이 되어 안팎의 경멸 속에서 거의가 자살한다. 정신대, 위안부 등 나라의 치욕은 그때부터 양산되고 있었다.

이런 아픔에도 불구하고 1910년, 기어이 나라를 잃는 경술국치를 불러들인다. 지금도 엄혹한 국제정세는 그때와 같고 오히려 남, 북이 분단되어 서로를 적대시하고 있다. 북한은 고위층의 탈북사태에도 여전히 핵과 미사일 개발에 집착하면서 대한민국을 극도로 위협하고 있다. 그러나 이 나라의 높으신 분들은 국가안보에 대한 그 어떤 결의도 보이지 않고 밤낮없이 다투다가도 자기 지역만큼은 군사시설이 들어오면 안 된다고 부르짖는다. 여야가 따로 없이 오직 정권교체에만 집중되어 있다. 도대체 어느 나라의 지도자들이기에 이 모양인가. 정치권이 뜻이 없다면, "좋다. 100만 명의 의병이 일어나 나라의 치욕을 크게 씻어야 할 때이다."

전남 함평출신의 작은 서당 훈장에서 몸을 일으킨 의병대장 심남일(沈南一, 1871~1910)은 "아침에 적을 치고 저녁에 조국의 산에 묻히는 것"이 의병이라고 외치며 형장의 이슬이 되었다. 모든 국민은 이와 같은 장군의 어머님과 의병의 심정으로 먼저 자신 내부의 이기심이라는 적을 무찔러야 한다. 그 다음, 치욕으로부터 나라를 크게 지켜내야 한다. 어떻게 이루어온 대한민국인가.
지금 우리에게 대의가 있는가?
대의란 오직 한 가지, 나라의 치욕을 또 다시 겪지 않고 당당하게 일어나 홍익인간의 건국이념을 되살려 지구촌 평화의 공급원이 되는 것뿐이다.

국학원 상임고문, 한민족원로회의 원로위원, 전단협 대표회장 원암 장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