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고구려~
고구려라는 말을 들으면 우리의 상상 너머에는 이미 만주 벌판을 말 달리고 있는 지도 모른다. 그리고 정확한 이유는 몰라도 가슴 벅차오르는 뭔가가 있다. 그래서 고구려는 한국인들의 관념 속에는 지나간 역사 속에 등장하는 고대 국가 이상의 것이다. 그런데 고구려에 관해 구체적으로 들어 가보면 별로 아는 게 없다.

▲ 민성욱 박사
그저 고구려하면 개국신화에 등장하는 주몽이야기, 유리왕의 황조가,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 바보온달과 평강공주,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광활한 영토를 개척한 광개토태왕과 장수태왕 정도 알고 있는 것이 고작이다. 물론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전부일리는 없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학계에서조차 정리되지 않은 것들이 많다. 이렇듯 고구려에 관해 제대로 연구가 안 된 것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물론 오래된 역사이고, 고구려의 강역 또한 지금의 북한과 중국의 영토에 해당된다. 고구려 시대 당시 역사를 서술한 『유기』100권과 그것을 요약한 『신집』 5권이 안타깝게도 남아 있지 않다. 그나마 남아 있던 역사서들도 불태워 지거나 없어졌고 남아있는 것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정도이다. 남아있는 사료가 부족하고 중국의 동북공정과 일본의 역사침탈을 통해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근거로 한 고구려에 관한 새로운 이야기를 해 보고자 한다. 고구려에는 오늘날 국무총리에 해당되는 관직이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국상이다. 이러한 고구려 국상은 그 어느 시대보다도 권한이 막강했고, 그에 따른 책임도 뒤 따랐다. 대표적인 국상이 명림답부, 을파소, 창조리, 연개소문 등이 있다. 인재를 등용하여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여 국방을 튼튼히 하고, 거듭된 흉년으로 굶주린 백성들을 왕이 궁실 수리를 위하여 징발하자 목숨을 걸고 백성들을 위하여 간언을 하지만 왕이 깨닫지 못하자 왕을 폐위시키고자 하였던 국상이 있는가 하면 왕으로서 하늘을 섬기고 백성을 아끼지 못한 것에 대하여 스스로 뉘우치고 목을 매 자살한 왕이 있었다. 그들은 국상 창조리와 봉상왕 이야기이다.

역사의 기록에는 신하의 충언을 받아들이지 않아 목매어 자결한 봉상왕과 모시던 왕을 죽게 하여 반역한 신하로 기록된 창조리와 신하의 충언을 받아들여 선정을 베풀어 통치한 문무왕과 의상법사의 두 기록이 전해오고 있다. 우리는 역사의 기록을 통해 동일한 두 충언의 결과가 각기 그 종말을 달리한 것에서 우리는 커다란 교훈을 얻고 있다.

창조리는 고구려 봉상왕 때의 사람으로, 국상 상루가 죽자 대사자였던 그가 국상이 되었다. 봉상왕 9년(292) 가을 8월에 나라 안의 나이 15살 이상인 정남들을 징발하여 궁실을 수리하였는데, 백성들이 먹을 것이 떨어지고 일에 지쳐서 그 때문에 도망하여 떠돌아다니게 되니 창조리가 간언하였다.
"하늘의 재앙이 거듭 닥치고 흉년이 들어 백성이 살 길을 잃어 젊은이들은 사방으로 흩어져 떠돌아다니고 어린이와 늙은이는 구렁텅이에 뒹구니 지금은 실로 하늘을 두려워하고 백성을 걱정하여 두려운 마음으로 반성할 때입니다. 대왕께서 일찍이 이를 생각하지 않고 굶주린 백성을 몰아 토목공사에 시달리게 하니 백성의 부모라는 뜻에 매우 어긋납니다. 하물며, 이웃에는 강한 적이 있어 우리의 피폐함을 틈타 쳐들어온다면 국가와 백성을 어떻게 하려고 합니까? 원컨대 대왕께서는 깊이 헤아려주십시오."
왕이 화를 내면서 말하였다.
"임금이란 백성이 우러러 바라보는 자리인데, 궁궐이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무엇으로 위엄의 중함을 보여 주겠는가? 지금 국상이 아마 과인을 비방하여 백성의 칭송을 구하고자 하는 것이 아닌가?"
이에 창조리가 말을 하였다.
"임금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지 않는다면 이는 어진 것이 아니며, 신하가 임금에게 임금의 잘못을 말하지 않는다면 이는 충성이 아닙니다. 신이 이미 국상의 자리를 이어 받았으니 감히 말을 아니 할 수 없을 뿐이지 어찌 감히 칭찬을 구하겠습니까?"
왕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국상은 백성을 위하여 죽고자합니까? 바라건대 다시는 말을 하지 마시오." 하였다. 창조리가 왕이 잘못을 뉘우치지 않을 것을 알고 물러나 여러 신하들과 폐위할 것을 모의하니 왕이 피할 수 없음을 알고는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이와는 반대로 신라 문무왕은 즉위하여 남산성을 중수하고 성안에 큰 창고를 설치하였고, 3년에 걸쳐 부산성을 쌓고, 안북하 강변에 철성을 쌓았다. 또 서울에 성곽을 쌓기 위해 책임관리를 명령하자, 이때 의상법사가 이 말을 듣고 글을 올려 아뢰었다.
"왕의 정치와 교화가 밝으면 비록 풀 언덕에 금을 그어 성으로 삼더라도 백성들이 감히 타고 넘지 않을 것이며, 재앙을 물리치고 복이 들어오도록 할 것이요. 만약 정치와 교화가 밝지 못하면 비록 만리장성이 있더라도 재해를 없앨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이에 왕이 공사를 곧 중지하였다.
역사의 기록에는 신하의 충언을 받아들이지 않아 목매어 자결한 봉상왕과 모시던 왕을 죽게 하여 반역한 신하로 기록된 창조리와 신하의 충언을 받아들여 선정을 베풀어 통치한 문무왕과 의상법사의 두 기록이 전해오고 있다. 우리는 역사의 기록을 통해 동일한 두 충언의 결과가 각기 그 종말을 달리한 것에서 우리는 커다란 교훈을 얻고 있다.
『삼국사기』에서 열전 9ㆍ10은 일종의 반역전이라고 할 수 있다. 창조리는 봉상왕을 폐위하고 죽음에 이르도록 하였다는 점에서 열전 9에 수록되었다고 여겨진다. 하지만 차대왕을 시해한 명림답부는 일종의 충신전이라고 할 수 있는 열전 5에 수록되어 차이를 보인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가?
『삼국사기』 편찬자인 김부식은 연개소문과 함께 창조리를 반역 열전에 넣어 버렸다. 이것은 후일 『고려사』를 편찬한 조선 건국 세력이 강조를 역적으로 분류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폭군이든 어쨌든 왕을 죽게 만들었으니 역적이라는 논리이다.
반면에 명림답부는 고구려 차대왕과 신대왕대의 인물이다. 차대왕을 죽이고 신대왕을 세웠다. 신대왕 때 처음으로 국상이 되어 이때부터 국상체제가 시작되었다. 한나라의 침공을 막아 공을 세웠다. 이때 사용한 청야전술은 을지문덕의 살수대첩으로 이어지기도 하였다. 이러한 정변이후 명림답부의 행보는 가히 괄목할만 하다. 창조리의 경우에 정변이후 그러한 정변을 상쇄하고도 남을 만한 업적이 없었다. 봉상왕의 뒤를 이어 즉위한 미천왕, 역사의 기록에는 도망자 신분으로 소금장수였던 그는 인생역전에 성공한다. 이렇게 인생역전에 성공한 미천왕은 활발한 정복활동을 펼치게 된다. 기세를 몰아 요동 진출도 시도한다. 이렇듯 고구려에는 살아있는 역사이야기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고, 그것을 통해 우리 역사에 활력을 불어 넣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상상 너머의 고구려 역사에는 역사가 주는 교훈과 미래 가치가 내재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