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은 이순신 장군의 견내량 대첩(1592년)과 원균의 칠천량 대패(1597년)가 있던 달이다.
대첩은 큰 승리이고 대패는 큰 패전이다. 한산도의 견내량과 거제도의 칠천량은 뱃길로도  지척이고, 두 곳의 전투 또한 예견과 준비라는 공통점이 있다. 한산해전이라고도 불리는 견내량 대첩은 철저한 예견과 분석을 토대로 오랜 기간 준비로 만들어낸 유비무환의 결과이다. 칠천량 대패는 무사안일과 무책임, 즉흥적인 전술이 쌓여 무비유환이 불러온 처절한 참극이었다. 원균은 통제사가 되자 이순신 장군이 부하들과 격의 없는 토론과 상의로 필승을 준비하던 ‘운주당’(현 제승당)을 장막으로 둘러쳐 막아버리고 매일 술과 여인으로 시간을 허비하였다. 막상 전투가 벌어지자 격정적인 조선 수군의 사령관은 적의 꼬임에 넘어가고 칠천량 앞바다에서 100척이 훨씬 넘는 판옥선, 거북선과 지휘관들 이하 1만 여 명에 달하는 무패의 조선 수군이 괴멸되었다.

 며칠 전 조선 수군이 가덕도에 잠시 상륙하였을 때, 왜군은 떠보기 위하여 소규모 기습을 하였다. 그러자 놀란 원균은 부하 400명을 버리고 도주한다. 매일 술과 여자에 빠진 그는 이미 무장으로서의 전투력을 잃어버린 것이다. 이보다 5개월 전인 그해 2월, 이순신 장군은 가덕도에서 물을 긷던 초동 5명이 왜군에게 끌려갔다는 정보를 듣고 가덕왜성을 직접 공격한다. 이어 겁을 먹은 왜군의 무장 요시라가 직접 와서 포로들을 풀어주며 이순신 장군에게 화친을 요청했던 것과 비교가 된다.

 장수 되는 자의 생사관과 기질 상의 다른 모습이다. 당시는 장수가 전장에서 목숨을 잃고  시신이 말가죽에 쌓여 돌아오는 것이 무인으로서 최고의 영광이고 가치이다. 그러나 그것도 승리한 뒤의 일이다. 조선 수군 최고의 책임자로서 무대책과 방탕으로 일관한 원균으로 인하여 조선의 사직은 사실 칠천량 앞바다에서 수몰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이순신 장군과 함께 바다를 누볐던 용맹무쌍 하고 지략이 풍부한 역전의 조선 장졸들이 수장되고 배설만이 겨우 11척과 도주함으로써 살아남았을 뿐이다. 준비 없는 대가가 이토록 혹심하였다. 일본은 칠천량 해전으로 이순신 장군과 조선수군에게 수없이 당한 치욕을 일거에 씻고 의기양양하게 명량으로 진격해 들어 올 수 있었다. 명량은 죽음의 문턱에서 막 돌아온 이순신 장군께서 나름대로 최소한의 준비와 목숨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매년 견내량 대첩에 즈음하여 한산도를 방문하여 예를 올려 왔던 터라 올해도 지인들과  다녀왔다. 통영의 충렬사에 들러 안내를 받고 영정 앞에 인사를 올리고 다음날 한산도의 제승당까지 둘러보았다. 경건해야 할 시간과 자리이다. 그러나 한산도를 오가는 유람선에서의 해설과 관광제도는 영 탐탁치가 않았다. 오가는 시간까지 불과 2시간 남짓으로 한산도를 둘려보고 오라는 것인데 그게 주마간산이 아닌가. 그나마 선장이 마이크를 잡고 겨우 10여 분간 한다는 해설 또한 가관이었다. 견내량이 어디인지 알려주지도 않고 그 전투가 어디에서 어떻게 벌어졌다는 설명도 없다. 섬이 게의 껍질 같다는 설과 이순신 장군이 갑옷을 벗고 땀을 식혔다는 설이 있는 ‘해갑도’는 아예 설명에서 빠져 버렸다. 다른 고장의 축제에서는 없는 이야기도 만들고 차용도 하는 마당에 통영은 더 없이 귀하고 수많은 역사적인 진실을 제대로 전하고 있지 않았다. 예컨대 거북등대의 석조 거북선의 하단에 사람의 얼굴 형상이 있는데 그것이 왜군의 얼굴을 상징하는 것으로 일부러 돼지 형상으로 만들었다고 해설하는 데는 놀라서 모골이 송연할 뿐이다. 거북선과 판옥선의 하단에 붙여 놓은 소위 도깨비 형상은 ‘전쟁의 신’으로 추앙 받는 ‘치우천왕 蚩尤天王’의 형상인 것이다. 자오지(慈烏支)환웅이라고도 불리는 치우천왕은 B.C. 2707년에 즉위하여 109년간 나라를 통치했던 배달국 제14대 천왕이다.                           

▲ 전라좌수영 거북선, 용머리 밑의 귀면상이 치우천왕의 상징물, 붉은 악마 상징 앰블럼.


한민족의 선조인 치우천왕은 중국인들도 숭앙하여 한나라의 시조 유방도 출정을 앞두고 제사를 올린 지고 무쌍한 군신의 존재이다. 이 제사의 관습이 우리 역사 안에서는 고려시대부터 기록이 있어 국가의 군사권을 상징하는 제사로서 ‘둑제(纛祭)’라고 불렀다. 근세조선시대에는 장군들이 명을 받아 임지로 떠나거나 때에 맞추어 제를 올렸고 그 깃발을 ‘둑기’라고 하였다. 서울의 뚝섬은 원래 둑섬으로 본뜻은 군신인 치우천왕께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다.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에도 친히 주관하여 둑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세 군데에 나타난다.
우리의 DNA에 새겨진 그 형상이 사라지지 않고 한일 월드컵 때에는 붉은 악마의 앰블럼으로 되살아났다. 이러한 배달국, 우리 조상으로 위대한 전쟁의 신, 치우천왕의 얼굴을 돼지의 형상이라니! 역사를 몰라서 하는 말이라 해도 너무한 것이 아닌가?

 한산도의 제승당 영내에도 관광객들에게 장군의 정신을 잘 알도록 전하는 해설사가 단 한 명도 보이질 않았다. 유감일 뿐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지역의 책임이 아닐 수 없다. 관련 지역의 관계, 정치계, 지역 문화계, 시민들도 맹렬하게 반성을 하고 모두 다시 교육을 시켜야 한다. 견내량에서 대패하여 외딴섬으로 도망쳐 해초를 먹으며 연명한 한 일본수군의 장군인 와끼자까 야스하루(脇坂安治)의 후손이 선조의 고통을 잊지 않기 위하여 지금도 일 년 중 하루는 해초만 먹는 가풍이 있다고 한다. 국민 모두가 역사를 너무 빨리 잊고 훼손 하고 있지는 않는지 철저하게 반성해야 할 일이다.

지금 한반도로 몰려오는 거대한 세력들의 각축 속에서 살아남기 위하여서는 두 눈을 크게 뜨고 역사를 바로 세워 철저하게 분석하고 대비하여 유비무환의 국가대책을 세워야만 한다.

       국학원 상임고문, 한민족 원로회의 원로 위원, 화가 원암 장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