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경희 국제뇌교육대학원대학교 국학과 교수

기·기 신화를 위시한 일본측 기록에 나타난 스사노오는 이즈모 지역을 개척한 문명신으로서 무사, 제철 종사자, 통치자, 제사장, 용사신(龍蛇神, 용신 또는 뱀신) 등 여러 측면을 두루 갖추고 있었다.  이들은 모두 스사노오라는 영웅의 여러 단면들을 보여주는 기록인데, 이들을 종합한 스사노오의 총체상은 어떻게 그려질 수 있을 것인가?

 스사노오의 첫번째 이미지는 무사이면서 제철 종사자의 면모이다.  이즈모에 당도한 스사노오는 ‘가라사비노쓰루기(韓鋤の劍)’라는 한국제 칼을 소지한 것으로 나타난다. 또한 스사노오는 이 칼을 휘둘러 오로치를 처단하였을 뿐아니라 죽은 오로치의 꼬리에서 구사나기노쓰루기(草薙劍)라는 칼을 꺼냈다고 했다.  이는 아마테라스에게 헌상되어 천황가의 보물인 3종신기(三種神器)중 하나인 아메노무라쿠모노츠루기(天叢雲劍)가 되었다.

 이 기록에 관해 많은 학자가 스사노오가 무사이면서 검을 제작하는 제철(단야(鍛冶)) 장인 세력의 지도자였다고 보았다.  이즈모 일대는 유명한 사철(沙鐵) 산지로서, 이를 채집하여 철을 제련하는 제철·무사세력의 지도자가 스사노오였다는 것이며 같은 맥락에서 그의 도래 동기를 사철을 찾기위한 것이었다는 주장도 나온 바 있다.
당시 금속기는 일차적으로 무기로서의 의미를 가졌지만, 한편으로 농기구로서의 의미도 있었다. 많은 학자가 지적하듯이 ‘가라사비노쯔루기(韓鋤の劍)’라는 단어에서 사비(鋤)는 본래 ‘쟁기’라는 뜻이었다.  또한 대장간도 한국에서 건너왔다는 뜻으로 ‘가라(韓)’를 덧붙여 ‘가라가누치(韓鍛冶)’라 하였다.  철제 농기구는 농업생산력을 더없이 증대시켰고 이는 스사노오세력이 성장하는 실질적인 기반이 되어 주었을 것이다. 

이렇듯 스사노오세력이 무사·제철세력이었음은 분명하지만 이들이 영위한 금속기문화를 단순히 무기나 농기구의 차원만으로 볼 수 없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즈모의 간바고진타니 유적이나 가모이와쿠라 유적 등의 청동기 제사 유적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의 청동기나 철기 등 금속기는 무기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종교의례를 위한 의기(儀器)의 역할이 매우 컸기 때문이다. 청동기는 특히 그랬다.  일부 학자는 이러한 측면에 집중, 스사노오를 단야술과 무술(巫術)을 연계한 존재, 곧 샤만(巫)으로 바라보기도 한다.
이처럼 많은 학자가 스사노오세력을 무사 또는 제철기술자 세력으로 바라보고, 그 지도자인 스사노오를 무사·제철업을 지도하는 무당 정도로 바라본다. 이러할 때 이즈모 일대에서 쏟아져 나온 많은 야요이 유적·유물도 샤머니즘적인 주술을 행하기 위한 시설이요 주술구로 이해될 뿐이다.


그러나 스사노오의 출자지인 고대 한국의 사상·종교문화의 핵심이 선도문화(선도 제천문화)이고 스사노오세력 역시 이러한 문화 기반 위에서 문명개척을 하였다는 점을 이해할 때 전혀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된다. 무엇보다 이즈모 일대에서 발견된 수많은 야요이 유적·유물도 제대로 된 해석을 할 수 있게 된다.   
스사노오 세력이 기반하고 또 일본열도로 전한 한국의 선도 제천문화는 이즈모의 야요이 유적·유물속에 오롯이 그 흔적을 남겼다.  그 대표적인 사례로 사우돌출형 분구묘나 이즈모대사(出雲大社)의 구조에 나타난 십자(十) 형태 내지 우물정(井) 형태의 천주(天柱, 솟대) 문화를 들 수 있다. 
먼저 사우돌출형 분구묘의 경우이다. 사우돌출형 분구묘의 경우 네 귀퉁이를 돌출하여 길게 늘어뜨림으로써 네 귀퉁이를 집중적으로 강조한 구조이다. 이 뿐아니라 분구를 조성한 후에도 평평한 분구 위에 사방으로 큰 나무 기둥 솟대 4개를 박아 세웠다.  십자(十字) 구조를 이중적으로 설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이즈모대사의 경우이다. 『고사기』에서는 오쿠니누시(大國主神)이 나라를 진무천황에게 양보한(國讓) 뒤 큰 궁전을 지어달라고 요구하여 얻은 것이 이 신사였다고 한다. 물론 이는 스사노오-오쿠니누시를 상징으로 하는 이즈모세력이 아마테라스-진무천황으로 상징되는 큐슈-기나이세력에 굴강해 들어가는 과정을 담고 있는 상징적 이야기이다.  이즈모대신의 주신은 스사노오였는데, 메이지시대에 오쿠니누시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즈모대사의 중심 건물인 본전은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건축 양식 중 하나인 다이샤쓰쿠리(大社造) 형식의 표본으로 고상(高床) 형식이다.  헤이안시대 기록인 『구치즈사미(口遊)』(970년)에 의하면 이즈모 대사의 원래 규모는 16척(약 48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크기였으나, 가마쿠라 시대에 화재로 소실되어 1744년 원래의 절반 정도 규모로 다시 지었다고 한다. 본전의 경우 기둥을 받친 고상식 건물인데, 특히 기둥의 구조가 매우 흥미롭다. 건물 중앙의 기둥(심주(心柱))를 중심으로 8개의 기둥이 둘러싼 형태였던 것이다. 이른 바 우물정(井) 구조이다.  또한 각각의 기둥은 나무 3개를 묶어 하나로 만든 ‘일(一)·삼(三)’의 방식으로 제작되었다.

      

이상에서 나타난 ‘솟대’ 구조나 ‘십자 또는 우물정’ 구조는 한국선도 제천문화를 대표하는 표상이다.  먼저 솟대는 하늘 높이 기둥을 세워 하늘의 생명(氣)과 사람의 생명(氣)을 연결하는 의미를  표현한 것이었다.  하늘과 땅을 사람이 연결한다는 한국선도 제천의 신인합일(신인합일) 사상, 또는 인내천 사상을 표현한 것으로 이러한 솟대문화가 한국 고대 문화 일반에 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문화현상임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다음 ‘십자 또는 우물정’ 구조는 한국선도의 기철학적 세계관인 ‘삼원오행(三元五行)사상’에 의한 것이다.  십자나 우물정의 가운데 중심점은 하늘, 곧 우주의 근원적 생명인 ‘한(一), 또는 일기(一氣)’를 의미한다.  선도 전통에서 ‘한(일기)’은 흔히 삼태극이나 삼족오로 표상화되었듯이 ‘천·지·인 삼기(三氣)’로 이루어져 있다. ‘천·지·인 삼기(三氣)’를 현대적으로 풀이해보면 ‘미세한 소리(인)와 진동(지)을 지닌 빛(천)’으로도 풀이된다.  이러한 ‘일기(삼기)’가 우리 선조들이 상고 이래의 선도문화를 통해 바라보았던 모든 존재의 실체로서의 생명(氣, 가시적으로는 빛(밝음)으로 드러남)이었던 것이다.


이렇듯 십자나 우물정의 가운데 중심점이 ‘일기·삼기’라고 한다면 주변의 4기둥은 ‘일기·삼기’의 생명이 만들어 내는 물질계의 4대 요소인 ‘공기·불·물·흙’, 또는 ‘공기·불·물·흙’이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물질계를 의미한다. 
또한 주변의 8기둥은 ‘공기·불·물·흙’을 각각의 음·양(한국선도식 표현으로는 여(呂)·율(律))로 나눈 것이다.  곧 중심은 생명계, 주변의 4나 8은 물질계를 의미한다.  생명계가 물질계를 만들어내고 주관하고 있으니 이러한 이치를 깨닫고 생명계와 하나되어야 한다는 세계관이 곧 한국선도의 삼원오행의 세계관이다. 
생명과 물질이 하나임을 자각하는 세계관은 모든 존재가 생명이라는 측면에서 하나이기에  조화와 상생을 중시하고 홍익을 주된 가치로 내세우게 된다.  이러한 세계관을 실제적으로 체율체득하기 위해 마련된 의례가 제천이며 따라서 제천의 구조물은 대체로 십자 구조, 내지 우물정 구조로 만들어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제천을 주관하는 집전자는 당대 최고의 권력자(군왕)이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생명과 조화·홍익의 세계관을 사람들에게 알려주고 천인합일의 선도수행을 지도하는 존재, 곧 당대 최고의 선인(仙人)이자 스승(師)이었던 것이다.  요서·요동지역에 자리하였던 환국이나 배달국을 통치하였던 삼성(환인·환웅·단군)과 같은 존재들로 필자는 이러한 문제의식에 따라 한국 상고·고대의 통치자를 ‘스승왕(師王)’이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을 제안해 오고 있다. 
이처럼 스사노오가 이즈모에 전파한 문화의 정신적 기반이 천인합일(신인합일), 또는 인내천의 선도 제천문화라고 할 때, 스사노오는 제천을 주관하는 제사장의 역할을 하였을 것임을 알게 된다.  단순히 무사·제철기술자를 지도하는 무당이 아니라 제천을 주관하는 제사장으로서 사람들에게 생명과 조화, 더 나아가 홍익의 가치를 가르치고 이끄는 ‘(선도문화의) 스승’을 표방하였던 것이다.   


스사노오의 ‘스승’으로서의 면모가 그의 이름속에 그대로 남아 있음은 매우 놀랍다. 곧 『고사기』·『일본서기』·『풍토기(風土記)』 등에서 스사노오의 표기는 ‘須佐之男, 須佐能袁, 須佐能乎, 須佐能雄’ 등 분명하게 ‘の’를 수반하는 표기가 있는가 하면 ‘素戔鳴, 速須佐雄, 速素戔鳴’ 등 스사우, 혹은 스사오 등으로 읽혀지는 표기가 있다. 미즈노 유(水野祐)와 같은 일본학자는 이중 후자가 원형으로, 이것이 무당을 의미하는 ‘수승(su-sung)’에서 나온 말이라고 하였다.  신라초기 왕호인 차차웅(次次雄, 玆充)과도 같다고 보았다.  한국선도가 샤만문화가 아닌 선도문화임을 이해하면, ‘수승’이나 ‘차차웅’이 무당이 아니라 (선도적 의미에서의) ‘스승’임을 분명히 이해하게 된다.  이렇게 스사노오가 ‘스승’의 의미라고 한다면 이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보통명사가 되는 것이며, 스사노오를 계승한 후왕들도 어느 시점까지는 스사노오로 불리었을 가능성이 있다. 『후한서』 '동이열전'에  107년 왜국(倭國)의 왕 ‘수승(帥升)’ 등이 생구(生口, 노비) 160인을 바치고  회견을 청하였다(安帝永初元年, 倭國王帥升等獻生口百六十人,願請見)는 기록이 나타나는데, 여기에 나타나는 왜국은 북큐슈 일원의 유력국가였던 나국(奴國)이나 이토국(伊都國)으로 여겨지지만 이때까지도 왜왕의 보통명사로 수승이라는 호칭이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앞서 스사노오가 무사·제철세력을 이끈 지도자이기도 했지만, 사상·종교적으로는 한국 선도문화 일반의 지도자상, 곧 군왕인 동시에 최고의 선인(仙人)을 의미하는 ‘스승왕(師王)’의 역할을 표방한 존재였음을 살펴 보았다. 
스사노오가 이즈모 지역에 도래한 후 스스로나 그의 아들·딸 등이 행한 행적은 이러한 스승왕의 이미지에 손색이 없는 모습이다. 곧 기·기 신화에 의하면

 스사노오는 ‘한국에는 금은이 풍부하다. 만일 내 아들이 다스리는 땅에 배가 없다면 좋지 않다’고 하며 몸에 난 털을 뽑아서 삼나무, 회나무, 피나무, 녹나무 등 각종 나무를 만들어 이들을 베어 배를 만들고 궁전을 짓는 등 용도를 정하였다. 과실나무 종자도 많이 심었다. 또한 아들 이타케루(五十猛尊)와 딸 오야쓰히메(大屋津姬命) 및 쓰마쓰히메(梢津姬命) 3신을 기이(紀伊) 지방에 보내 수목 종자를 널리 뿌리게 했다.…이타케루는 많은 나무 종자를 가지고 천강하여 이를 한국땅에는 심지 않고 큐슈를 비롯한 일본 전역에 뿌려 푸른 산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공적 많은 신’으로 숭배되었다.(축역) 

고 하였다. 

  정복자로서 선주민들을 정복하고 지배했다는 내용이 아니라 일족들을 모두 동원하여 식수사업을 통해 배와 건물을 만들고 식량난을 해결하였고 이에 선주민들이 그 일족들을 ‘공적많은 신’으로 숭상하였다는 내용이다.  선도적 세계관인 생명과 조화(홍익)사상을 전달하는 데 그치지 않고 직접 몸으로 보여주는 실천적 삶을 살았던 것이다. 
이상 스사노오의 ‘스승왕’의 표방, 또 이러한 이름에 걸맞는 실천적 삶은 일차적으로 이즈모 지역에 뿌리내린 선도문화의 전통을 보여주는 의미가 있지만 더 나아가서는 상고 이래 선도문화라는 세계관이 주는 생명존중과 조화(홍익)의 가치관 속에서 살아갔을 우리 선조들이 일구어나간 실제적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로서도 의미가 깊다. 선도문화의 본향인 한국에서 오히려 선도문화의 전통이 잊혀져 선가적 삶의 모델을 찾기가 쉽지 않은데, 일본에서 이러한 흔적을 만나게 됨은 참으로 반가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처럼 스사노오가 선도 제천문화를 이끄는 사왕을 표방·지향하였다고 할 때 후대에 아마테라스-진무천황계가 스사노오계를 국진신國津神(지신地神) 계열로 분류한 것은 다분히 정치적인 목적하의 ‘신격 강등’이었음을 알 수 있다. 수많은 한반도 도래인들과 마찬가지로 스사노오 역시 선도 제천문화 전통을 계승한 천신족이었던 것이다.  스사노오가 초치검을 아마테라스에게 헌상하였듯이 스사노오 또한 아마테라스와 마찬가지로 한반도 도래인 일반의 신물인 삼종신기를 보유하고 있었음을 이즈모 일대에서 출토된 일본열도 최고의 수준의 청동제기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