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천절은 언제부터 우리 민족의 기념일이 되었는가?  그 뿌리는 단군왕검이 나라를 세운 기원전 2333년부터 시작된다. 오래 전부터 단군은 동방의 시조라는 인식이 있었으며, 이는 조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은 개국 초기부터 단군에 제사를 지냈다. 태조 1년(1392) 8월 11일 예조는 “조선의 단군(檀君)은 동방(東方)에서 처음으로 천명(天命)을 받은 임금이니 평양부(平壤府)가 때에 따라 제사를 드리게 하라”고 상소하여 그대로 하게 하였다. 조선은 비록 기자(箕子)를 중시하였으나 그에 못지않게 단군도 높였고, 기자와 동등하게 모시도록 하였다. 단군이 동방의 시조라는 의식은 이후에도 이어져 국가의 제사로 받들었다. 평양의 단군묘와 단군사, 구월산의 삼성사, 강화도의 마니산(참상단) 등에서 국가 차원의 제례를 대체로 봄, 가을에 하였다. 단군으로부터 동방의 역사가 시작되었다는 인식은 조선 시대에 지속되었다.

▲ 오래전부터 단군이 동방의 시조라는 인식이 있었으며 외세의 위협에 민족의식이 싹트면서 단군의 고조선 건립일을 개천절로 기념하기 시작하였다. 정부는 1949년 개천절을 국경일이 정하였다. 사진은 2014년 국학원이 서울에서 개천절 축하행진을 하고 있는 모습. <사진=코리안스피릿 자료사진>

 

조선 후기 외세에 시달리면서 단군의 건국일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민간에서 기념되어 1919년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경축행사를 개최함으로써 위상이 높여졌다. 1904년 백봉(白峯) 중심의 단군교단의 발표한 ‘단군교포명서’에는 10월3일 ‘단군개극입도지경절(檀君開極立道之慶節)’, 즉 단군이 나라(極)를 열고 가르침을 세운 경축일로 삼았다. 1909년부터 단군의 건국을 기념해야 한다는 논의가 언론에 보도되기 시작했다. 1909년 11월 12일 황성신문에 단군대황조의 4241회 개극절(開極節) 경축예식이 개최된 기사가 게재되었다. 이 신문 1909년 11월21일자 ‘단군성조제일(檀君聖祖祭日)’ 논설은 건국시조를 추모하고 기념하는 것은 천리(天理)이며 자연스러운 것이고 풍속과 전례(典禮)의 당연한 일이다. 이를 조국성(祖國性)이라 하며 문명족(文明族)이라 하다. 만약 건국시조를 기념하지도, 승모하지도 않는다면 조국성이라 문명족이라 칭할 가치가 없다고 하였다. 1919년 상해에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국무원 주최로 음력 10월 3일 ‘대황조성탄 급 건국기원절 축하식(大皇祖聖誕 及 建國紀元節 祝賀式)을 개최하였다. 이로써 개천절은 국가의례가 되었다. 이 행사는 정부요인과 동포가 참여하여 거행하였다. 다음해 임시정부는 독립선언일과 건국기원일을 국경일로 정하였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1920년 3월 15일 임시의정원을 열어 국경일안을 논의하였는데, 이때 양력으로 할 것인지, 음력으로 할 것인지 논란이 되었다. 독립신문 1920년 3월18일 ‘임시의정원 기사’ 제하에 게재된 내용을 보면 조완구(趙琬九)는 건국기원일은 완전히 양력으로 산출하기까지 음력을 쓰자고 했고 최창식은 양력 10월 3일을 쓰자고 하였으나 모두 부결되었다. 나용균(羅容均)의 "독립선언일은 3월1일 건국기원일은 4253년 전의 음10월3일이 양력으로 무슨 달 무슨 일인지 알아내어 정하자”는 안이 가결되었다.

 

이듬해 1920년 음 10월 3일에는 상해에서 정부인사와 동포 300~400명이 모여 개천절 기념행사를 하였다. 독립신문 1921년 11월11일자 시조건국개천절 기사에는 "금일은 우리나라가 생겨난 날이니 우리가 즐겨 부르고 기뻐 뛰놀 날이오. 그러나 국내에 있는 동포는 이러한 경절(慶節)에도 자유로이 즐겨하지 못하고 적의 속박하에 도리어 맨날 전 적황(敵皇)의 소위 천황절을 그 아니꺼운 중에서 지냈을 터이오. 우리는 어서 하루바삐 우리의 적을 몰아내고 이러한 좋은 경절에 마음껏 즐기기를 바랍니다. 이 한 할아버지의 자손된 우리는 경향(京鄕)과 상반(常班)을 막론하고 다 한마음이 되면 우리의 적을 용이하게 몰아낼 수 있으니 우리 그렇게 하기를 결심합시다.”라고 하였다.

 

임시정부의 개천절 행사는 환국 때까지 꾸준히 이어졌다. 당시에는 개극절, 단군절, 건국절, 개천절 다양하게 표현하였으나 1920년대 중반부터는 대부분 개천절로 부르게 되었다. 임시정부가 개천절에 정부차원의 기념식을 거행한 이래 기념행사가 널리 보급되었고 점차 민족의 기념일로 자리잡아갔다.

 

1921년 개천절 행사에서 보듯이 이러한 개천절 행사는 한민족의 민족 정체성, 민족의식, 자주독립 의지를 고취하여 일제는 박해하고 탄압하였다. 특히 자원수탈과 민족말살책동이 심화되던 만주사변 이후로는 탄압이 더욱 강화되었다. 이로 인해 1930년대 중반이후 국내에서는 행사개최를 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해외에서는 동포가 거주하는 곳마다 개천절 행사를 해마다 하였다.

 

광복이 되면서 개천절은 국경일로 기념하였다. 1945년 11월 7일 개천절 행사가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서 개최되었다. 1946년 개천절 기념행사는 임정요인 등 독립운동가들이 귀국한 가운데 10월 27일 장엄하게 열렸다. 1948년 정부가 수립된 후 1949년 10월 1일 ‘국경일에 관한 법률’을 제정·공포하여 이 날을 개천절로 정하고 국경일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