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화성은 조선 22대 왕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무덤을 옮기면서 그 주변에 살던 백성을 위해 정약용의 빈틈없는 설계를 바탕으로 지은 계획 신도시이다. 또한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를 열기 위해 아버지께 못다한 효심까지 표현한 화성 행궁에서 성곽까지 아울러 우리나라 역사상 성곽의 꽃이라 할 수 있다.

▲ (사)우리역사바로알기의 현장학습에 참가한 학생들이 21일 수원 화성에서 서북공심돈의 독특하고 아름다운 구조에 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사)우리역사바로알기의 10월 21일 현장학습은 국가보훈처 사업 ‘현충 시설 활성화 사업’으로 수원 화성에 다녀왔다. 늘 인기 있는 수원 화성이지만 그곳에 현충 시설이 있다는 건 모르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 (사)우리역사바로알기 현장학습에 참가한 학생들이 21일 수원 화성 서노대에 올라 군사시설을 알아보고 있다.

화성 행궁의 정문 신풍루를 지나고 혜경궁 홍씨의 진찬례가 열렸던 봉수당으로 향하였다. 평소에는 흐드러지게 차려진 잔칫상과 수많은 하객, 마당을 장식한 42가지의 조화 등에 초점을 맞춘 조선 최대의 궁중행사에 집중했다.

▲ (사)우리역사바로알기의 현장학습에 참가한 학생들이 21일 수원 화성 성곽을 돌며 해설을 듣고 있다.

그러나 봉수당에서 이날에는 귀 기울여 독립의 염원을 들었다. 봉수당 진찬연을 빛냈던 가무를 담당했던 것은 바로 기생들이었다. 1919년 3월의 기생들은 일제가 봉수당을 헐고 대신 자혜병원과 수원경찰서가 세운 그 자리에서 김향화를 선두로 기생 30여명이 일제히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만세운동은 즉흥으로 벌인 일이 아니었다. 일제의 ‘기생단속령’으로 인해 관기로 내몰린 기생들이 사전 계획하여 표출한 것이었다. 주모자 김향화는 곧 체포되어 6개월의 옥고를 치렀다.

조선시대의 이야기만 서려 있을 것 같았던 화성행궁에서도 독립의지를 느낄 수 있었고 일제가 훼손한 건물이 다시 복원되어있음을 감사하였다.

정조의 어진을 모신 건물 화령전 쪽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정조대왕 능행반차도 그림을 만났다. 기나긴 그림 속에서 능행의 규모를 알 수 있었고, 수많은 참여자의 신분과 역할을 짐작해 볼 수 있었다. 정조와 혜경궁 홍씨의 자리를 찾아보고 행사를 주관한 경기감사와 우의정 채제공의 수고도 느낄 수 있었다. 군복을 멋지게 입고 있는 정조대왕께 인사를 드리고 정조가 키운 장용영의 무예24기 공연을 보기 위해 서둘러 화성행궁을 빠져나왔다.

▲ (사)우리역사바로알기 현장학습 참가자들이 21일 수원 화성의 서문인 화서문 옹성구조에 관해 설명을 듣고 있다.

《무예도보통지》에 실린 24가지의 무예를 직접 실현하여 보이는 무예24기 공연은 정말 훌륭했다. 정조가 심혈을 들여 키운 장용외영의 발자취를 따라가려는 이들의 노력에 감사했다.

점심 후 화성성곽 답사에 본격적으로 나섰다. 화서문을 통해 성곽 길을 따라 서장대에 오르고 팔달문까지 답사하는 일정이었다. 아름다운 성곽 길을 돌며 10년 계획이었던 공사기간을 2년 8개월로 단축할 수 있었던 실학자들의 과학기기와 정조의 애민정신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었고, 성곽과 어우러진 멋진 자연에 흠뻑 취해보는 호사도 누렸다. 수원화성이 복원된 문화재이지만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될 수 있었던 이유는 충분함을 체득하였다.

억새와 어우러진 아름다운 화서문과 예술작품으로까지 느껴지는 서북공심돈을 보고 힘을 모아 서장대로 올라갔다. 계속되는 계단에 숨을 몰아쉬기도 하면서 여장의 총안으로 불어오는 바람에 땀을 식히며 다다른 서장대에서 내려 보는 수원시내의 모습은 지금까지의 힘듦을 다 잊게 해주었다. 군사들을 지휘하던 정조대왕을 상상하며 밤에 서장대에 올라보고 싶다는 생각을 해보았다.

▲ 군사력 강화에 힘썼던 정조대왕의 심정을 서장대에서 느껴본다.

서장대를 지나 숨어 있는 서암문을 구경하고, 남쪽 문 팔달문을 향해 가는 길은 내리막이라 콧바람 부르며 산책하는 기분으로 내려갔다. 서남각루로 통하는 서남암문의 맞은편에 높은 탑이 있다. 광복 후 중 포산에 세워던 것을 1969년 팔달산으로 이전한 3·1독립기념탑이다. 이 탑은 한국인에게 돌 맞아 죽은 수원경찰서 사범계주임 노구치의 순국비를 허문 자리에 세웠던 것이다. 수원의 3·1운동은 1919년 3월 16일 서장대와 연무대에서 각각 수백 명이 만세를 부르며 종로를 향해 행진하였다. 그 이후에도 수백 명이 수원의 여러 곳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그 외침은 지금까지 우리의 가슴속으로 전해오고 있다.

▲ (사)우리역사바로알기의 현장학습 참가자들인 21일 수원 화 3.1운동기념탑 앞에서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있다.

3·1독립기념탑 바로 옆에는 대한민국독립기념비가 서있다. 우리국권을 침탈하고 지배한 일제의 침략과 지배에 맞서 각자의 자리에서 여러 가지 방법으로 독립투쟁을 했던 수많은 애국선열들이 있었다. 이들의 염원이 결실을 맺어 마침내 1945년 해방을 맞이하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를 수립하여 독립국이 되었다. 수원시민들이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이다. 우리는 그 앞에서 그 시절 우리의 선조들이 목 놓아 부르고 싶었던 그 마음을 되새기면서 큰소리로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 (사)우리역사바로알기는 21일 수원 화성에서 현장학습을 진행하였다.

이제는 팔달문으로 내려오는 길만 남았다. 경사가 높은 계단이 끝없이 이어져있다. 뿌듯한 마음으로 천천히 내려오면서 다시 한 번 아름다운 수원 화성에서 느끼는 독립정신을 되새겨본다. 백성을 사랑하는 정조의 마음이 담긴 수원 화성에서 백성들은 나라를 사랑하고 되찾는 독립을 일구어갔던 것이었다. 애민과 독립의 교차점을 충분히 느끼고 온 우리의 아름다운 문화유산 수원화성의 의미를 잊지 말아야 겠다.

(사)우리역사바로알기 윤성아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