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승헌 글로벌사이버대학교 총장

지금부터 20년, 30년 후에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하고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인류는 현재의 문명이 태동했을 때부터 계속 하나의 길로 왔다. 그 길은 소유욕과 이기심을 우선 가치로 하는 지배와 경쟁의 길이었다. 산업과 과학기술의 발전으로 문명의 속도는 한층 더 빨라졌고,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인류사회는 인간성 상실과 환경오염으로 인해 전 지구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처해 있다.

지금 인류가 타고 있는 열차는 소유욕과 이기심을 동력으로 달리는 ‘무한경쟁’의 열차다. 이 열차에 계속 타고 있는 것은 바른 방향이어서가 아니라, 다른 길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대로 계속 달린다면 이 열차는 어디에 도달하게 될까? 혹시 벼랑 아래로 그대로 급추락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점점 커지고 있다. 인간과 지구가 공존하고 공생하기 위해서는 열차가 달리는 방향을 바꾸어야 한다. 잘못된 방향으로 계속 속도를 높이기만 한다면 파국적인 결과만이 있을 뿐이다.

노자는 “방향을 바꾸지 않으면 지금 향하고 있는 곳이 바로 도착점이 될 것이다.”라고 말한 바 있다. 지금 속도를 늦추고 멈추어야 한다. 개인이든 집단이든 잠시 멈춰 서서 지금 우리가 어디에 갔는지, 어디로 가고 싶은지, 실제로는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나는 현재 인류문명이 안고 있는 문제의 해법을 단순하지만 신비로운 생명현상인 숨에서 찾았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도 쉬지 않고 호흡을 계속하고 있다. 숨을 내쉬고 나서, 숨을 들이마시면 그다음에는 다시 숨을 내쉬어야 한다. 호흡을 계속하려면 새로운 공기를 받아들이기 전에 폐 안에 가득 찬 공기를 전부 뱉어내야만 한다. 계속 들이마시기만 한다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다. 살고자 하면 누구나 들이마신 숨을 내쉬어야만 한다.

호흡은 생명이다. 한 번의 들숨과 한 번의 날숨을 합하여 ‘한숨’이라고 한다. 들이마시고 내쉬는 한숨이 끝날 때 하나의 생명도 끝이 난다. 그리고 새로운 숨을 통해 또다시 새로운 생명이 시작된다. 인생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계속 성장하고 발전하다가 서서히 늙어 다시 왔던 곳으로 돌아간다. 시작과 끝이 둘이 아니고 하나다. 생명의 아름다움, 존귀함, 신비함은 바로 이 하나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모든 생명은 수많은 시작과 끝의 반복 속에 있다. 이는 우리 민족 고유의 경전인 천부경에 담긴 철학이며 지혜이다.

사람은 하루에도 셀 수 없이 많은 호흡을 한다. 무수한 들숨과 날숨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일일이 호흡을 의식하지 않아도 저절로 숨을 쉰다. 만약 호흡을 일일이 의식하고 조절해야 한다면 과연 지금처럼 편안하고 자연스럽게 숨 쉴 수 있을까? 아마 아무것도 못 하고 숨 쉬는 일 하나에만 매달려도 부족할 것이다. 누구도 숨 쉬는 법을 따로 배운 적이 없다. 태어나는 순간 배우지 않고도 호흡을 한다. 깊이 잠든 순간에도 호흡은 아무 문제 없이 이루어진다. 생각할수록 놀랍고 감사한 일이다.

사람은 인종이 다르고 문화가 달라도 공통된 하나가 있다. 숨을 바탕으로 해서 인류의 문화와 삶이 유지된다는 사실이다. 사람은 같은 숨을 쉬고 있는, 하나의 근원에서 나온 존재이다. 사람의 코로 하늘이 들어오고, 입으로는 땅이 들어온다. 사람은 하늘과 땅에 뿌리를 박고 피어난 생명이다. 마치 음극과 양극이 만나 밝은 불빛을 만들어 내듯이 사람의 생명은 천지간의 합작으로 환히 피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천지인(天地人)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인류는 그 생명의 근원을 잃어버린 채 살아가고 있다. 피부색과 언어,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한 생명이 다른 생명을 무참히 짓밟고 인권을 유린하는 일이 일어나고 있다. 인간세계도 이런 지경인데, 지구상의 다른 동물과 식물에 하는 행태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인류가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가 무엇인지를 생명의 뿌리인 숨을 통해서 알 수 있다. 숨을 관찰하면 현재 우리가 어디에 와 있고, 어느 곳을 향해 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숨을 더는 들이마실 수 없을 정도로 최대한 들이마시고 그대로 멈춘다. 나는 이 지점이 바로 인류의 문화가 와 있는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지금 인류는 한껏 숨을 들이마신 상태다. 이제 숨을 내쉬어야 할 지점에 다다랐다. 이런 상태에서도 계속 경쟁과 지배를 추구한다면 계속 숨을 들이마시기만 하는 사람과 같다. 그 결말은 말하지 않아도 알 것이다. 하지만 그 순간 숨을 내쉬면, ‘아, 이제 살았다.’ 하는 안도감이 찾아올 것이다.

인류는 지금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다. 숨을 힘껏 들이마셔 극에 다다른 사람에게는 1초가 지옥과도 같다. 계속 들이마시기만 할 것인가, 아니면 멈추고 서서히 내쉬면서 새로운 ‘숨’을 이어 나갈 것인가. 지금 이 상태에서 인류 역사를 더 지탱하고자 한다면 최소한 숨을 멈추기라도 해야 한다. 그리고 서서히 그 숨을 내쉬어야 한다. 끝없는 들숨과 날숨에 의해 이어지는 생명의 순환과 인류 역사의 진화과정은 다르지 않다.

사람이 깨달아야 하는 이유는 생명으로서 존재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다. 지금 생명으로서 존재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도, 더 절박하게는 생존을 위해서 날숨의 지혜가 필요하다. 그러나 급격히 숨을 내쉬는 것이 좋지 않은 것처럼, 경쟁과 지배의 시스템을 갑자기 멈추게 할 수는 없다. 먼저 근본적으로 하나임을 인식하고, 또 서로의 다름은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부터 서서히 시작해야 한다.

그동안 지구는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주며 지상의 생명을 길렀다. 마치 어머니와도 같은 사랑을 인류에게 주었다. 하지만 이제 병든 지구는 인간에게 사랑이 아니라 위협으로 작용하고 있다. 물도 마음 놓고 마실 수 없고 숨도 마음껏 쉴 수 없다. 그런데도 문제의 원인을 찾고 해결책을 내놓아야 할 정치인과 지도자, 전문가들은 상황을 정확하게 보지 못하고 있다. 정치 논리나 경제 논리 또는 종교적인 견해나 전문분야의 시각으로만 문제를 본다. 그래서 전체를 보지 못한다.

인류와 지구의 문제는 오직 생명의 논리로만 풀 수 있다. 들숨이 있으면 저절로 날숨이 따라오듯이, 생명이 원하는 쪽으로, 다 같이 살리는 쪽으로 인류문명의 방향을 돌려세워야 한다. 문명의 방향을 돌려세우는 일은 뛰어난 몇몇 지도자나 특정 단체가 나서서 풀 수도 없다. 전체를 보는 통찰력을 지닌 사람들이 필요하다. 바로 깨달음을 터득한 대중이 필요하다.

지구와 인간에 깃든 생명의 아름다움과 소중함을 가슴 깊이 공감하고 실천하는 사람이 지구시민이다. 인간을 사랑하고 지구를 사랑하는 수많은 지구시민만이 이 지구를 살릴 수 있다. 70억 인류 중에 적어도 1억 명의 지구시민은 탄생해야 새로운 희망을 이야기할 수 있다. 이것이 이 시대에 전 세계적으로 지구시민운동(Earthcitizen Movement)이 필요한 이유다.

지구시민 운동의 목적으로 ‘1달러의 깨달음’ 캠페인을 하고, 전 세계 지구시민의 축제인 지구시민페스티벌을 열고, 지구시민 리더를 양성하기 위한 지구시민학교를 만들고, 지구시민공동체인 얼스빌리지를 만들고 있다. 1억 지구시민들이 날숨의 지혜로 이 지구를 살리고 새로운 정신문명시대를 열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말이다. 자신의 호흡에서 인간과 지구를 연결하는 생명의 신비를 느끼고, 인류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나서는 지구시민, 이들이 바로 21세기가 원하는 신인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