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가야박물관에서 눈에 띄는 전시물은 가야를 대표하는 악기, 가야금이었다. 가야금의 기원은  <삼국사기>에 나온다.  “가야금은 중국의 쟁(箏)을 본떠서 만든 것으로 가야의 가실왕(嘉實王 또는 嘉悉王)이 12개월의 율려(律呂)를 본받아 12현금(絃琴)을 만들고 이에 성열현(省熱懸) 사람인 우륵을 시켜 12곡을 짓게 하였다.”

▲ 가야 가실왕의 총애를 받은 악성 우륵은 가야금으로 12곡의 연주곡을 만들었다. 대가야 박물관에 전시한 가야금은 정교하고 섬세한 문양이 돋보인다. <사진= 강나리 기자>

가야금 명인 고 황병기 선생은 “중국 <사기>나 <삼국지> 위서 동이전에 보면 ‘동이족은 하늘에 제를 지내고 주야로 음주와 가무를 즐겼다’ ‘한반도 남쪽에 고유한 현악기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며 “중국의 영향보다는 우리의 옛 현악기를 바꾼 게 가야금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라고 추정했다.

대가야 가실왕의 총애를 받은 우륵은 왕의 뜻을 받들어 12현금인 가얏고, 즉 가야금으로 12곡을 지었다고 하는데 그 이름만 전한다.  경북 고령군 대가야읍 쾌빈리(금곡) 북쪽에 '정정골'이라는 마을이 있다. 이 정정골이라는 이름은 가실왕 때 우륵이 살면서 가야금 소리가 ‘정정’하고 끊임없이 마을에 울려서 생긴 것이라 하니 가야금 연주가 얼마나 번창했는지 짐작케 한다.

그러나 우륵은 551년 대가야의 국운이 기울자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로 떠났다. <삼국사기>에 신라 진흥왕이 낭성(지금의 청주)에 행차하였을 때, 대가야 출신의 악사 우륵과 그의 제자 이문을 불러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 우륵은 가야가 국운을 다하던 551년 가야금을 가지고 신라로 떠났다. <사진=우륵박물관 홈페이지 이미지>

400년 광개토태왕의 원정에 의해 큰 타격을 받은 금관가야를 대신해 가야연맹의 종주국이 된 대가야는 어떻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것일까?

대가야는 464년 신라의 구원요청을 받아들여 신라를 구했고, 481년에는 백제, 신라와 동맹해 고구려와 말갈이 신라 미질부성(경북 포항)을 침공할 때 원병을 보낼 만큼 강성했다. 서쪽으로 진출해 소백산맥을 넘어 기문지역(지금의 전라북도 남원, 임실, 장수)을 차지했다.

6세기 한반도는 고구려 백제 신라가 벌이는 영토전쟁으로 아군과 적군이 수시로 바뀌는 격전의 시대였다. 영토를 넓혀가는 백제와 신라 사이에서 대가야는 백제와 신라 사이를 오가며 생존을 위한 외교 전략을 펼쳤다. 그중 하나의 사건이 이뇌왕과 신라왕녀의 혼인 동맹이다.

522년 이뇌왕은 신라에 혼인을 청했다. <삼국사기> 본기 법흥왕 9년의 기록에는 “봄 3월 가야국 왕이 사신을 보내 혼인을 청하니, 이찬 비조부(比助夫)의 누이를 보냈다.”고 나온다. <일본서기>에는 “가라왕(加羅王)이 신라왕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드디어 아이를 가졌다.”고 기록되어 있다. 가야 이뇌왕과 신라 이찬 비조부의 누이 사이에 태어난 아이가 바로 대가야의 마지막 왕이 된 월광태자이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고령현 편에는 대가야로 알려진 반파국의 태자 월광은 이뇌왕의 아들이며 어머니가 신라사람이라고 했다.

그런데 대가야 왕은 이 신라왕녀가 데리고 온 종자 100인이 몰래 신라의 의복을 입었다고 하여 쫓아냈고 혼인이 깨졌다고 한다. 이때 신라가 돌아가는 길에 대가야의 3성과 북쪽 국경의 5성을 함락시켰다.

▲ 가야 이뇌왕과 신라 왕녀인 이찬 비조부의 누이와의 혼인동맹에 관한 <삼국사기> 법흥왕조 기록. 왼쪽은 1512년 정덕본으로 보물 제723호이며, 오른쪽은 1537년 옥산서원본으로 보물 제525호 이다. <사진=국사편찬위원회 홈페이지>

반면 <일본서기>에는 가야 연맹의 맹주였던 대가야의 왕이 친 신라 정책을 선언하고, 다른 가야 소국에 신라 왕녀를 따라온 종자 100명을 신라 옷을 입혀 보냈다. 그러나 친 백제 성향인 가야 소국들이 반발하여 신라인들을 돌려보냈다. 이에 분노한 신라 법흥왕은 이뇌왕이 사정했음에도 가야 8성을 공격해 혼인동맹을 강제로 깼다. 태자까지 낳은 이뇌왕과 이찬 비조부 누이의 혼인은 무참히 깨지고 파경을 맞았다.

대가야의 국운은 기울었다. 562년 9월 진흥왕이 보낸 이사부 장군과 부장인 화랑 사다함에 의해 대가야는 패망했다. 이사부는 우산국(지금의 울릉도)를 정벌한 백전백승의 노장이었다. <삼국사기> 진흥왕 본기와 사다함 열전을 보면, 이사부가 부장으로 임명한 화랑 사다함은 기병 5천 명을 이끌고 내륙 깊숙이 쳐들어가 대가야의 성문을 기습해 흰 깃발을 꽂았다. 급습에 대비하지 못한 성 안은 두려워 어찌할 바를 몰랐고, 성 밖에서는 흰 깃발에 이미 투항한 것으로 여겨 대혼란이 일어났다. 이때 신라의 노장 이사부가 진격하자 대가야가 마침내 항복했다. 당시 사다함의 나이가 15~16세였다고 한다.

대가야의 마지막 태자 월광은 어떻게 되었을까. 532년 신라에 투항한 금관가야는 구형왕의 아들 김무력, 손자 김서현, 증손 김유신이 신라 진흥왕의 통일전쟁에 적극 협조해 왕계를 계속 이어갔던 데 반해, 대가야의 왕계는 월광태자로 끝이 났다.

지금까지 밝혀진 바로 월광태자가 대가야의 마지막 왕 도설지(道設智)라는 설이 가장 유력하다. 도설지란 이름이 ‘달(月)지’로 풀이되며, 도설지의 행적을 살펴보면 월광태자와 공통점이 많기 때문이다. 월광태자는 아버지 이뇌왕의 뒤를 바로 계승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화랑세기>에는 이뇌왕이 숙부 찬실에게 왕위를 빼앗겼다고 하고, 대가야가 친백제정책을 폈을 때 신라인을 어머니로 둔 월광태자가 왕위에 오르는 것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월광태자는 신라로 넘어가 신라의 장군이 되었다. 단양 신라 적성비와 창녕 척경비에 551년과 561년 신라 진흥왕을 보좌하여 공을 세운 장군으로 도설지의 이름이 새겨있다. 대가야가 패망의 길을 걷던 562년 9월, 도설지는 대가야의 왕으로 등극한다. 김태식 교수는 "대가야 지역을 정벌한 진흥왕은 정복지의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대가야 왕족인 그를 잠시 왕으로 세운 것"으로 해석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제30권 합천군 편에는 최치원이 지은 <석순응전>을 인용해 “그(해인사) 서쪽 산 두 시냇물이 합치는 곳에 거덕사(擧德寺)라는 절이 있는데, 옛 대가야국 태자 월광이 결연(結緣, 불문에 드는 인연을 맺음)한 곳”이라고 기록했다.

대가야 지역을 완전히 장악한 진흥왕은 가야 왕위에 올렸던 도설지 왕, 즉 월광태자를 폐위하였다.  폐위된 월광태자는 대가야의 시조모인 정견모주를 모신 해인사 서쪽 거덕사에서 승려가 되었으며,  월광사에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월광리는 현재 경남 합천군 야로면 월광리에 있다. 일설에는 어머니 양화공주와 함께,  신라군대를 피해 합천으로 이동하던 중 숨을 거두었다는 전승도 있다. 대가야는 마침내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다.

가야문화답사기 다음 편에서는 지금껏 한반도에서 나타난 적이 없던 7층 적석피라미드를 남긴 금관가야 마지막 왕 구형왕의 흔적을 따라 가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