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는 한국인들의 상처이다. 일본인들이 ‘다케시마(竹島)는 일본 영토다’라고 소리를 지를 때마다 한국인들은 아픈 상처를 찔린 듯 비명을 지른다. “헛소리 하지 마라. 독도는 한국 땅이다.” 소리친다고 독도가 내 땅이 될까? 그렇다면 대마도도 한국 땅, 만주 땅도 한국 땅. 연해주도 우리 땅이라고 외쳐라. 전 세계가 내 땅이라고 외쳐 보아라.

집요한 준비를 하지 않고 말로만 떠드는 것을 ‘이불 속 활개 짓’이라고 한다. 언젠가 일본이 운영하는 독도 사이트에 들어가 그들의 논리를 살펴보았다. 우리가 생각하지도 못했던 여러 논리가 있었다. 아! 우리는 우리에게 유리한 것만 떠들고 일본은 그들 입맛에 맞는 것만 외쳐왔구나. 둘 다 이불 속 활개 짓이다. 이왕 치려면 대로에서 활개를 쳐야지!

계백은 처자식을 살해함으로써 패잔병을 한순간에 일당백의 영웅으로 바꿔버렸다. 그와 그를 따른 병사들은 죽었지만, 그들의 용기는 백제의 왕궁보다 찬란했고 그들의 이야기는 백제사직보다도 긴 장엄을 만들었다. 독도도 그렇게 지켜야 한다. 우리는 독도 영웅을 인정하고 독도 전설을 널리 알려야 한다. 그리고 미래에 대한 대비를 해야 한다.

1952년 4월 28일, 우리의 얼까지 빼놓으려고 했던 일본이 미군정으로부터 자유를 얻게 된다. 그 시절 이 땅의 지식인과 민중은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일본이 독도를 가져가려고 한다는 것도 짐작하고 있었다. 먼저 ‘똑똑한’ 이승만이 ‘선방’을 날렸다. 1월 18일 독도를 우리 측 수역에 포함시킨 평화선을 발표하며 이 선을 넘어오는 배에 대해서는 발포를 하겠다고 선언한 것이다. 북쪽에서는 전쟁을 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남쪽에도 전선을 만들겠다고 공포한 것이다. 그러나 영토문제는 어느 나라든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일본은 군정에서 풀려난 직후이기 때문인지 1952년에는 외교적으로만 독도 영유권을 주장했다.

그러나 1953년에 접어들자 실력행사로 나오기 시작했다. 6·25전쟁 발발 3주년 직후인 1953년 6월 27일 새벽 3시, 일본은 해상보안청 순시선인 ‘오키’와 ‘구스류’함을 이용해 30명의 공무원을 독도에 상륙시켜 자갈마당 해안에 ‘島根縣 隱地郡 五箇村 竹島(시마네현 오치군 고카무라 다케시마)’라고 쓴 말뚝을 박았다. 그리고 그곳에서 조업 중이던 울릉도 주민들을 조사한 후 이곳은 일본 영토인 다케시마니 다시는 오지 말라고 얼렀다.

어민들은 마침 배가 없었기에 독도에서 쫓겨나지 않았다가 울릉도에서 배가 들어오자 일본인들이 박은 말뚝을 뽑아 배에 싣고 가서 울릉군청과 울릉경찰서 앞에 내놓고 대책을 세워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변변한 관용선(船) 한 척 없는 관공서에서 어떻게 대책을 세운단 말인가. 독도 부근은 육지에서 먼 바다인지라 그곳의 평화선까지는 우리 군함도 제대로 나가 있지 못했다.

바로 그때 뜻있는 사람들이 일어섰다. 당시 등산은 여유 있는 집안의 사람들이 하는 ‘스포츠’였다. 한국산악회는 여유가 있고 많이 배웠으면서도 용기가 있는 사람들의 집합소였다. 1910년을 전후한 시기 인류는 남극과 북극에 첫발을 디뎠다. 그로부터 사람들은 극지를 향한 도전에 나섰다. 한국산악회도 한국의 극지 탐험을 벌이고 있었다. 애초 이들은 1952년 8월 15일 독도를 탐험하려고 했으나 날씨가 나빠 들어가지 못했다가 이듬해 일본이 독도에 말뚝을 박았다는 이야기에 서둘러 독도 탐험을 준비했다. 10월 14일 울릉도에 들어간 이들은 그 전 해에 준비했다가 설치하지 못해 울릉군에 맡겨 놓았던 ‘대한민국 독도’를 새긴 표석을 되찾아 다음날 독도 자갈마당의 암석 위에 설치했다.

한국 산악회가 독도에 들어왔을 때 일본 해상보안청 배는 이를 멀리서 지켜보고 있다가 산악회원들이 떠나자 다시 상륙해서 이 표석을 떼 내어 버리고 그들의 영토 말뚝을 박았다. 이에 대해 우리나라는 대응을 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곧 추위가 닥쳐왔기에 양국은 독도에 말뚝 박기 전쟁을 여기서 일단 멈추어야 했다. 본격적인 싸움은 이듬해 해동기에 펼쳐졌다. (다음호 계속)


이정훈 신동아 편집위원 ho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