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사관을 총체적으로 완성한 조선총독부에서 편찬하고자 했던 《조선반도사》는 ʻ제1장 漢의 군현과 설치, 1절 四郡의 건치와 그 강역ʼ으로 시작하는데, 그들의 의도를 정확하게 보여준다고 할 것이다. 단군조선의 역사성을 부정하는 한편 한국사가 1000년 이상 식민지였다는 역사상을 만들어내기 위해 일제 식민사학자들은 한사군의 역사지리를 연구했다.

1894년에 「조선낙랑현도대방고(朝鮮樂浪玄菟帶方考)」를 발표한 나카 미치요를 시작으로 시라토리 구라키치(「한의 조선사군강역고(漢の朝鮮四郡疆域考)」(1912)), 이나바 이와키치(「진번군의 위치(眞番郡の位置)」(1914)), 이마니시 류(「진번군고(眞番郡考)」(1916)) 등이 차례로 한사군 위치에 관한 글을 발표했다. 이들은 대동강 북쪽으로 보느냐 남쪽으로 보느냐 하는 차이는 있었으나 대체로 낙랑군이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대동강 일대에 있었다고 보았는데, 여기에는 조선후기 실학자들의 한사군 연구가 많은 영향을 끼쳤다.

조선총독부에서 완성한 식민사관에서도 위만조선 도읍 왕검성을 지금의 평양으로 보았다. 조선총도부에서 편찬한 《심상소학일본역사 보충교재 교수참고서1》(1922)에서는, 한무제는 위만조선을 멸망시키고 그 땅에 진번, 현도, 낙랑, 임둔의 4군을 설치하였는데, 조선 북부에 있던 낙랑군은 후한・위・진에 이르기까지 유지되다가 미천왕 때 고구려 소유가 되었다고 한다.

남인 실학자들은 광범위하게 수집한 중국 기록에 근거하여 낙랑군 ‘재평양설’을 주장하였다. 앞서 본 것처럼 이들의 지리고증 방법은 ① 근거를 제시하지 않은 상태에서 주장만 하고 ② 자신의 주장과 상반되는 부분은 원(原) 사료를 인용할 때 일부러 배제하고 ③ 자신의 주장과 배치되는 학자의 의견은 근거를 제시하지 않고 배척하는 방식이었다.

그렇지만 식민사학자들은 그들의 목적을 달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으므로 남인 실학자들의 지리고증 방법을 그대로 수용하였다. 이병도의 일본인 스승들(시라토리 구라키치, 쓰다 소키치(津田左右吉), 이케우치 히로시)의 역사지리 연구는 한백겸과 안정복, 특히 정약용 같은 조선후기 실학자들이 많이 고민하였던 내용을 바탕으로 수행되었다는 것이다.

1910년부터 1915년까지 조선총독부 촉탁 신분으로 조선 전역의 고적(古跡)을 조사한 도쿄제국대학 공과대학 교수 세키노 다다시(関野貞)는 대동강 일대의 토성리 토성 등을 비롯하여 그 지역이 과거 낙랑군 중심지였음을 알려주는 유물・유적들을 발굴, 문헌 정보를 보완하는 물적 증거를 제공하였다. 문헌 연구로는 한국사의 시작이 중국세력의 지배 하에서 시작되었다는 그들의 계획을 달성할 수 없었으므로 유물을 근거로 하였다. 실증을 할 수 있는 고고학을 통한 한사군 위치 규명을 시도하였던 것이다. 이후 1920년대 중후반에 이르기까지의 조사를 통해 확인된 유적과 유물들은 낙랑군 중심지가 평양이었음을 확인해주는 핵심적인 증거로 인정받았다고 한다.

신채호는 이러한 유물들은 최리의 낙랑국이 한과 교통할 때 수입한 기물이거나 고구려가 한과의 전쟁에서 이겨서 노획한 것들이라고 보았다. 낙랑군 유물에 관한 당 시대의 본격적인 비판은 정인보에 의해 주도되었다. 정인보는 이른바 ‘낙랑출토품’들에 관해 봉니(封泥) 위조품을 근거로 봉니조작설과 점제비(秥蟬碑) 발견 과정 및 내용상 문제점, 낙랑토성 출토 문자명 와당(文字銘瓦當)의 문제점 등을 제기하였다. 하나의 사례를 들어보면, ʻ漢나라를 대체한 왕망은 낙랑(樂浪)을 낙선(樂鮮)으로 태수(太守)를 대윤(大尹)으로 고쳤다. 따라서 ʻ낙랑대윤(樂浪大尹)ʼ이란 존재하지 않는 관명(官名)인데 평양에서 4개의 ʻ낙랑대윤ʼ 봉니가 당시 발견되었던 것이다.ʼ 평양 출토 유물을 근거로 “평양이 한대(漢代) 낙랑군 치소 터였다”는 일본인들의 주장에 정인보는 《조선사연구》에서 ʻ조작을 바로잡는 글(正誣論)ʼ을 써서 하나하나 논박하였다.

윤내현은 한사군은 서한의 유철에 의해 만들어졌는데, 서한 시대에 조성된 유적은 하나도 없고 훨씬 늦은 동한 시대의 유적만 존재한다고 하여 대동강 유역의 유적은 한사군의 낙랑군 유적이 아닌 동한의 광무제에 의한 낙랑유적이라고 주장하였다.

낙랑군 유물에 대한 해방 이후의 비판은 북한학계에서 주도하였다. 대릉하를 경계로 진나라와 접경한 서쪽 경계선은 서기전 108년 고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변동이 없었으므로 평양은 고조선 유민의 독자적 중심지이며, 해방 이후 새로이 발굴된 2600여 개의 묘는 나무곽무덤, 귀틀무덤, 벽돌무덤 등으로 이들은 중국의 것과는 명확히 구별되는 독자적인 무덤 양식임을 강조하였다. 특히 낙랑군이 평양에 있었다는 주장의 논거가 되었던 봉니와 점제현 비석에 대한 기왕의 위조설을 비석과 봉니의 성분분석을 통해 재천명하였다.

2017년 11월 〈한국고고학전국대회〉에서 ʻ위만의 왕검성은 평양에 존재하지 않았으며, 고조선 종말까지 요동반도에 있었다ʼ는 연구 결과도 발표되었다. 위만의 왕검성 자리에 낙랑군 치소인 조선현이 있었다는 그간의 역사학계 주장에 따르면, 낙랑군 조선현은 요동반도에 있었다는 것이 논리적 귀결이다.

결정적으로, 북한학계의 구체적인 고고학 반론에 뒤이어 세키노 다다시의 일기도 공개되었다.(문성재, 『한사군은 중국에 있었다』) 낙랑군 재평양설의 물적 증거를 제공하여 낙랑군이 한반도 평양이라고 구체화시킨 세키노 다다시가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위하여 모두 갖추어진 낙랑출토품류를 구입했다’는 일기가 공개되자 그 물적 증거는 위조된 것이라는 의심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대정 7년(1918) 3월 20일 맑음 북경

서협씨의 소개로 중산용차 씨(지나 교통부 고문, 월후 출신)를 방문, 그의 소개로 우편국장 중림 씨를 방문, 우편국 촉탁인 문학사 흑전간일 씨의 동료로부터 유리창의 골동품점을 둘러보고, 조선총독부 박물관을 위하여 漢代의 발굴품을 300여 엔에 구입함.

대정 7년 3월 22일 맑음

오전에 죽촌 씨와 유리창에 가서 골동품을 삼. 유리창의 골동품점에는 비교적 漢代의 발굴품이 많아서, 낙랑 출토품류는 모두 갖추어져 있기에, 내가 적극적으로 그것들을 수집함.

이상에서 식민사학자들이 단군 및 단군조선 부정, 기자로부터 시작하는 한국사, 낙랑군 재평양설이라는 남인 실학자들의 상고・고대사에 대한 역사 인식을 계승한 후 식민사관에 입각하여 창작한 타율성론의 한 축을 살펴보았다.

나카 미치요, 이마니시 류는 ‘지명인 왕험에서 왕검이란 이름을 꾸며내었다’고 기록한 정약용・한진서의 주장을, 나카미치요, 시라토리 구라키치, 조선총독부의 《심상소학일본역사 보충교재 교수참고서1》는 ‘단군에 대한 일은 모두 터무니없고 근거가 없는데 승려들의 기록이 정사에 기록되었다’는 안정복・한치윤의 주장을 충실히 계승하였다.

단군과 단군조선을 부정하자 한국고대사는 당연히 기자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변개되었다. 조선 유학자들이 바라보던 교화군주 기자는, 식민사학의 관점에서 바라보자 식민지를 개척한 중국인이 되었다. 남인 실학자들의 고대사 인식을 계승한 후 식민사관으로 바라보자 한민족의 역사는 1000년 이상을 중국 식민지에서 시작한 역사로 변개되었고, 식민사학 타율성론의 한 축은 이렇게 완성되었다.

식민사학자들은 위만조선 도읍지에 세워졌다는 낙랑군 조선현 위치를 예외없이 대동강 유역 평양으로 보았다. 이는 남인 실학자들의 지리고증 연구 방법과 연구 성과를 그대로 계승한 위에 물적 증거를 위조하여 완성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