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시아 동북부 지역에는 만리장성, 고구려 천리장성, 고려 천리장성 이렇게 3개의 성이 있습니다.

중국의 만리장성은 중국이 수비를 목적으로 쌓은 성으로 북방 민족의 침략을 막기 위해 쌓았습니다. 기원전 222년에 진의 시황제가 중국을 통일한 후 만리장성을 연결했습니다. 여기서 북방 민족은 아홉 부족이 연맹체를 이루어서 나라를 세운 단군조선 연맹 북방 민족을 말합니다.

이미지 이화영
이미지 이화영

 

고구려의 천리장성은 고구려가 수나라의 침공을 물리친 후에 당나라의 침공에 대비하여 요동 만주 벌판의 부여성(중국 길림성 농안/장춘)에서 요하 하구까지 쌓은 성입니다. 631년에 축조를 시작해서 647년에 완공했습니다. 645년에 당태종이 고구려를 침공 했을 때 천리장성은 훌륭한 방어선 역할을 했습니다.

고려의 천리장성은 요나라(거란), 금나라(여진)의 침입을 막기 위해 1033년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1044년에 완성하였습니다. 고려 천리장성을 두고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일본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사'를 바탕으로 한 국사 교과서에는 천리장성이 압록강 어귀에서 평안남도 북단을 가로질러 함경남도의 동해 바닷가(정평 해안의 도련포)까지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인하대 고조선연구소(소장 김연성)는 2017년 5월 26일에 학술회의에서 『고려사』 「지리지」와 요(遼)나라의 역사서인 『요사』를 대조해서 연구해 본 결과 고려 시대의 국경선이 지금의 원산만 이남 지역이 아니라 중국 요령성 요양 부근이라는 의견을 발표했습니다. 인하대 고조선연구소 발표에 의하면 고려 천리장성은 고구려 천리장성 위치와 거의 같습니다.

만리장성은 북방 민족과 중국 한족의 경계선 역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수나라 당나라가 세워지면서 만리장성은 더이상 북방 민족과 중국 한족의 경계가 되지 못합니다. 만리장성이 세워질 때까지는 북방 민족이 공세를 펼치는 세력이어서 한족이 장성을 쌓아야 했지만 세월이 지나 공세와 수세를 펼치는 세력 관계가 바뀌게 되면서 북방 민족 연맹체인 고구려가 만리장성에서 물러나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한 것이 고구려 천리장성입니다.

고구려가 망하고 발해가 세워지면서 중국 한족의 공세를 막아내고 고구려의 옛 전선을 회복하는 듯 했으나 북방 민족의 분열로 발해가 망하고 북방 민족들 사이는 적대적 대립 관계가 되었습니다. 발해 이후로 북방 민족의 분열은 고착화되었습니다. 북방 민족은 제각각 나라를 건국해서 고려(高麗)는 918년부터 1392년까지 474년 존속을 했고 거란족은 동아시아 중국 북부에 요(遼)나라를 건국해서 907년부터 1125년까지 218년 존속을 했으며 여진족은 동아시아 중국 북부에 금(金)나라를 건국해서 1115년부터 1234년까지 119년 존속을 했습니다. 1271년부터 1368년까지 97년간은 몽고족이 원나라를 건국해서 중국 대륙(중원)을 지배, 통치했습니다. 고려는 북방 민족의 일원인 거란족과 여진족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장성을 쌓기 시작했고 이렇게 만들진 것이 고려 천리장성입니다. 그러므로 고려의 천리장성은 고구려의 천리장성과는 성격이 다르게 북방 민족의 분열을 상징합니다.

북방 민족의 연맹체를 유지하던 정신적인 사상은 단군조선부터 내려온 선도 사상으로 추정됩니다. 그러나 단군조선의 멸망과 고구려, 발해의 멸망으로 선도 사상이 약화되면서 정신적 구심력이 약해져 북방 민족의 결속력은 와해됩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에서 1135년에 고려에서 묘청이 서경에 새로운 정부를 세우고 재건국 운동을 일으킵니다. 묘청 세력은 유학(儒學)만 공부하고 과거를 통해 관료가 된 개경의 기득권층에 의해 전통사상이 약화되는 현상을 바로잡으려 했으며 유학파들에 의해 고려가 중국화 되어가는 현상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묘청 세력은 고려가 전통사상을 중심으로 재건국되어야 하고 나아가 다른 북방 민족들까지 고려의 울타리 안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옳다고 믿어서 친중국적이고 반 북방 민족적인 유학파(儒學派)를 제거해야 한다고 판단했습니다. 그러나 묘청이 주도한 재건국 운동은 실패합니다.

묘청이 주도한 재건국 운동이 실패하자 김부식을 비롯한 유학파의 관료들이 귀족화되어 차츰 대토지소유자가 되었으며 도태된 호족 출신의 무인(武人)들을 무시했습니다. 그 결과 무인세력(武人勢力)은 중국적 유학파에 반기를 들어 1170년부터 1270년까지 100년 동안 무신정권(武臣政權)시대가 되었습니다.

발해의 멸망으로 비록 우리 겨레와 다른 북방 민족이 갈라지게 되었지만 그것은 정치 경제적 차원의 갈라섬이었습니다. 그러나 묘청의 재건국 운동 실패로 중국적 유학파에 의해 전통사상과 전통문화가 약화되었고 그 결과 전통사상과 전통문화에 친숙한 무인세력의 극단적인 반발을 불러일으켜서 무신정권 시대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시대에 불교가 도입되어 전통사상과 불교를 융합하지 못한 고구려와 백제는 멸망하고 불교사상에 전통사상을 부분적으로나마 융합한 신라가 살아남았습니다. 고려는 과거제도를 도입하면서 본격적으로 중국으로부터 유학을 받아들임으로써 전통사상과 유학과 불교사상과의 충돌이 일어나서 묘청의 재건국 운동, 무신정변과 같은 사건이 발생하게 됩니다.

고려는 전통사상인 선도와 유교, 불교 이렇게 세 가지 사상이 불안정한 혼거 상태이므로 고려 시대의 지식인들은 새로운 방향을 찾는 노력을 하였습니다. 이승휴는 《제왕운기》(帝王韻紀)를 출간하고 이규보는 장편서사시 《동명왕편》(東明王篇)을 지어 겨레 역사의 정통을 다시 세우려 하였고 일연은 단군조선에서부터 후삼국까지의 유사를 모아 역사서 『삼국유사』(三國遺事)를 편찬했고 이암은 초대 단군왕검에서 마지막 47대 고열가 단군에 이르기까지 2096년간의 단군조선사가 편년체로 『단군세기』(檀君世紀)를 편찬했습니다.

그러나 고려 시대의 지식인들이 새로운 방향을 찾는 노력이 결실을 맺기 전에 새로운 사상인 주자학(朱子學)이 수입되었습니다. 주자학은 안은 불교이고 밖은 유교인, 이를테면 내불외유(內佛外儒)로 불교의 장점을 유교에 융합한 새로운 사상입니다. 고려 시대 사람들은 종교 철학적 갈증은 불교에서 해결하고 유교는 정치와 교육 등의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러나 주자학이 수입되면서 종교 철학적 갈증을 주자학에서 해결할 수 있게 되어 고려 지식인들에게 급격하게 주자학이 퍼지게 됩니다.

중국은 외래사상인 불교가 오랜 세월 중국을 휩쓸면서 중국의 전통사상인 유교가 퇴색되고 불교의 말기적 폐단이 드러나고 있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고자 남송(南宋)의 주희(朱熹, 1130~1200)가 공자(孔子)와 맹자(孟子)의 사상을 중심에 두고 불교사상을 융합한 것이 주자학입니다. 주자학은 중국의 전통사상과 외래사상인 불교가 융합된 사상이므로 중국에는 맞는 사상이 되었으나 고려는 우리 겨레의 전통사상인 선도와 주자학을 융합하는 데 시간과 노력이 필요한 상황이었습니다.

행촌 이암 선생은 『단군세기』를 통해 우리 겨레의 전통사상을 잘 설명해 놓았습니다. 그리고 이암 선생의 제자인 목은 이색 선생이 우리 겨레의 전통사상과 주자학을 융합하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색 선생이 우리 겨레의 전통사상과 주자학을 융합하고 제자들이 숙성한 후에 정리된 사상으로 새로운 나라가 건국되었다면 좋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이색과 이성계는 친구 사이였지만 이색은 이성계가 학문과 덕이 부족하여 임금이 되기에 적합하지 않다고 여겼습니다. 그래서 이성계의 개국(開國)에 반대합니다. 그리고 이색은 고려의 운명이 다 되어가고 있었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고 본 것일 수도 있습니다.

이성계가 1392년에 조선을 개국하고 5년 뒤인 1397년에 손자(孫子) 이도(李祹)가 태어나고 이도는 26년 뒤에 임금(세종대왕)으로 재위에 오릅니다. 역사에 가정은 없지만 그래도 저는 이런 상상을 해봅니다. 만약 이성계가 마음을 비우고 기다렸다면 26년 뒤에 세종대왕과 같은 성군이 새로운 나라의 개국시조가 되지 않았을까?

고려를 개국한 왕건(王建)은 순리에 맡겼기에 모두가 추대해서 임금이 되었습니다. 이성계도 순리에 맡기고 기다렸으면 이성계의 손자가 왕건처럼 모두가 추대하는 개국시조가 되었을 거라는 생각해봅니다. 그랬다면 이성계가 세운 조선과 같이 사대주의에 빠져 명나라에 조공을 바치는 약한 나라가 아니라 전통사상과 주자학이 융합된 사상으로 단결되어 여진, 거란, 몽고족과 연맹체를 이루는 단군조선 같은 밝고 강한 나라가 탄생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고려시대는 문명의 혼거 단계였습니다. 고구려적인 전통과 백제적인 전통 및 신라적인 전통이 융합되지 못한 채 뒤섞이고 나아가 말갈이나 거란, 여진의 문화까지 보이지 않게 스며들어 온갖 사고방식이 혼거하면서 갈등을 겪던 때가 고려 시대였습니다. 그 뿐만아니라 문화 사상적으로는 전통문화 사상, 불교문화 사상, 유교문화 사상의 세 가지 문화사상이 서로 투쟁하면서 공존하던 시대 였습니다.

목은 이색 선생과 제자들이 합심하여 우리 겨레의 전통사상과 주자학을 융합하여 한국적 주자학으로 재탄생시킨 후에 새로운 나라가 건국이 되었다면 주자학보다도 완성도가 높은 사상을 바탕으로 여진, 말갈, 거란, 몽고와 같은 북방 민족을 아우르는 북방 민족 연맹 국가의 탄생도 가능했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1368년에 명나라가 건국되고 동아시아 동북부 지역은 명나라의 지배력이 약해진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고려가 우리 겨레의 전통사상과 주자학을 융합한 새로운 사상을 만들어내고 세종대왕과 같은 훌륭한 군주 역량을 갖준 인물이 새로운 국가를 건국하여 동아시아 동북부 지역에 흩어져 있는 여진, 말갈, 거란, 몽고와 같은 북방 민족을 규합하는 연맹체를 만들 수 있는 기회가 있었습니다.

이성계와 정도전의 야심에 의해 1388년 위화도 회군으로 고려왕조를 뒤엎고 주자학이라는 수입된 사상의 깃발로 조선을 건국했기에 고려 내부에서 준비되고 있던 사상융합의 맹아들이 모질게 짓밟힘으로 북방 민족을 규합하는 연맹체를 만들 절호의 기회를 놓쳤습니다.

역사는 반복됩니다. 지금도 우리나라는 고려 시대와 같은 기회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에서 우리 겨레의 전통사상인 선도에 불교, 유교, 기독교, 공산주의, 자본주의를 융합한 새로운 사상이 나오면 통일한국, 중국, 일본, 대만, 몽골, 베트남이 참여하는 동아시아 경제 문화 블록이 실현되고 더 나아가 인류가 하나 되는 평화로운 세상을 기대해 봅니다. 이것이 우리나라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 이화세계가 이루어지는 꿈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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