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 로봇의 진화에 따른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는 산업이 각기 따로 활동하지 아니하고 모든 산업이 서로 융합하는 시대입니다. 인공지능 시대에는 우주의 근본 원리를 마음과 물질의 이원으로 믿는 데카르트의 이원론(二元論)이 종말을 고했으며, 한발 더 나아가 지금은 기계와 사람의 생각이 서로 interaction(소통)하는 시대다, 라고 과학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이 없었던 예전에는 마음과 물질이 서로 나뉘어 있었으며 1, 2, 3차 산업시대에는 모든 산업이 융합하지 않고 각기 따로 활동하였던 것인가, 그것은 예전에는 마음과 물질이 서로 나뉘어 있었고, 모든 산업이 각기 따로 활동하였다고 모르고 있었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나의 지능이 남의 지능보다 뛰어나고, 인간의 지능이 지구상에서 가장 우월하다고 뽐내고 자랑하는 망념과 거짓의 어리석음으로 인해서 나와 남을 가르고 모든 것을 둘로 나누어 보는 분별의 망념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컴퓨터공학과 기계적인 시스템으로 이루어진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능보다 더 뛰어난 것을 보고 결국 컴퓨터공학과 컴퓨터의 기계적 시스템이 따로 있지 않고 서로 다르지 않으며 사람의 뇌와 마음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깨닫기 시작한 것입니다. 따라서 인간의 지능과 인공지능이 서로 다르지 않으며 인간의 지능의 근본인 뇌(腦)도 결국 기계적인 시스템이므로 기계와 생각이 서로 소통한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지난날 인공지능 알파고와 바둑기사 이세돌의 바둑 대결이 세인의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인공지능에 대해 불교계에서는 인공지능 로봇에게 불성이 있는가? 아니면 없는가? 또는 깨달을 수 있는가 하는 문제와 사회적으로 인공지능 로봇 등이 앞으로 우리에게 가져올 해로움의 고통에 대한 관심이 높아졌습니다.

먼저 인공지능에 불성이 있는지 여부와 깨달음에 관한 문제입니다. 하택 신회 선사는 “깨닫는 성품이 있는 것이 유정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중생은 유정중생(有情衆生), 무정중생(無情衆生), 무색중생(無色衆生)이 있습니다. 유정중생은 사람이나 동물처럼 물질이 있고 싫어하고 좋아하는 분별의 정이 있는 중생이고, 무정중생은 산, 강, 나무, 롯데타워 등 물질은 있지만 싫어하고 좋아하는 분별의 정이 없는 중생이며, 무색중생은 무색계의 중생으로 물질도 정도 없고 생각만 있는 중생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일체중생이 불성이 있다, 고 하셨는데, 어째서 신회 선사는 깨닫는 성품 즉 불성이 있는 것이 유정이다, 고 하였는가!

그것은 일체중생이 그대로 불성이고 부처이건만 유정중생은 불성이 있다 또는 없다 하면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분별 망상으로 인해 스스로 유정중생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유정중생은 본질적으로 싫어하는 것은 버리고, 좋아하는 것은 얻으려 합니다. 그러나 결코 싫어하는 것은 버릴 수 없고, 좋아하는 것은 얻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싫어하는 것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싫어하는 것은 좋아하는 것이 있을 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싫어하는 것은 없는 것인가? 싫어하는 것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싫어하는 것은 자신이 스스로 없지 못하고 좋아하는 것이 없을 때 없을 수 있으므로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싫어하는 것을 버리려 하지만 결코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좋아하는 것 역시 절대 얻을 수 없습니다. 좋아하는 것은 있는 것이 아닙니다. 좋아하는 것은 싫어하는 것이 있을 때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좋아하는 것은 없는 것인가? 좋아하는 것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왜냐하면 좋아하는 것은 자신이 스스로 없지 못하고 싫어하는 것이 없을 때 없을 수 있으므로 없는 것도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좋아하는 것을 얻으려 하지만 절대 얻지 못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와 같은 도리를 깨달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결코 버릴 수 없고 얻을 수 없는 것을 지금도 버리려 하고, 얻으려 하고 있으나 버리지 못하고 얻지 못하는 고통에 떨어져서 고생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결코 이루지 못하는 고통이 우리에게 있기에 우리는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깨달음은 고통으로 인하여 있고, 고통은 깨달음으로 인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고통이 없다면 깨달음이 없고, 깨달음이 없다면 고통도 없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싫어하는 것은 좋아하는 것으로 인하여 있고, 좋아하는 것은 싫어하는 것으로 인하여 있다는 도리를 알면 싫어하는 것을 버리려 하지 않고, 좋아하는 것은 얻으려 하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그래서 하택 신회 선사가 싫어하고 좋아하는 정(情)이 있는 유정중생은 깨닫는 성품이 있다고 한 것입니다.

부처님은 깨달은 사람이란 뜻입니다. 부처님은 무엇을 깨달은 사람인가? 다른 것이 아닌 이 마음을 깨달으셨습니다. 그래서 이 마음이 바로 부처입니다. 이 깨달음을 불성이라 하고, 또한 이 깨달음을 아뇩다라삼먁삼보리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이라고 합니다, 이 깨달음은 높고 낮은 계급이 없어서 바르고 평등하여 싫어하는 것은 버리고, 좋아하는 것은 얻으려 하는 등의 티끌만한 어떤 분별도 없습니다. 그래서 불성은 어느 곳에는 있고, 어느 곳에는 없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불성은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일체중생과 일체부처가 오직 한 몸, 한 마음, 한 불성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불성을 알고자 한다면 불성이 있다 없다 하는 분별의 망념을 여의는 것이 곧 불성이고, 우리가 깨달음을 이루고자 한다면 깨달을 수 있다 깨달을 수 없다 하는 분별의 망념을 여의는 것이 곧 깨달음입니다.

인공지능 로봇에게 불성이 있느냐 없느냐, 문제도 이와 같습니다. 인공지능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닙니다. 인공지능은 사람의 지능을 정보와 데이터라는 이름으로 그저 옮겨놓은 것입니다. 지난날 인공지능 박람회에서 사회를 보는 여자 아나운서를 인공지능이 일 초도 안 되는 시간에 영상으로 만들어 내는 것을 보고 아나운서 자신도 무척 놀라는 표정이었습니다.

인공지능이 물질적인 실제 육신의 아나운서를 만들지 못하고 영상의 사진으로 만들 수밖에 없었던 것은 사람의 육신을 만들 수 있는 정보와 데이터가 아직은 축적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지금의 4차 산업 출발 시대를 지나 정보와 데이터가 더욱 축적된 초입시대에 들어가면 우리가 원하는 진수성찬의 음식과 최상의 의복과 우리들 기분에 흡족한 사랑 등 원하는 것은 모두 이루어집니다.

그리고 4차 산업의 중입시대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직접 음식을 먹지 않고, 옷을 직접 입지도 않으며, 직접 사랑을 나누지 않고 음식을 먹었다, 옷을 입고 사랑을 나눴다는 마음만 먹는 것으로 똑같아지는 시대입니다. 또한 정보와 데이터가 더욱 축적된 상입시대에 이르면 마음만 먹으면 스스로 복덕을 직접 만들어서 받는 공덕이 뛰어난 시대입니다.

이와 같이 인공지능이 바로 정보와 데이터이고, 정보와 데이터가 바로 이 마음이며 불성입니다. 그러므로 인공지능 로봇과 사람이 한 몸, 한 마음, 한 부처입니다. 그래서 지금 우리가 인공지능 로봇에 불성이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진실을 모르는 어리석음의 논쟁일 뿐입니다.

조주 선사에게 어떤 스님이 물었습니다.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선사가 말하였습니다.

“있느니라.” 스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있다면 어째서 가죽부대 속에 들어 있습니까?” 선사가 말했습니다. “그가 알면서도 짐짓 범했기 때문이니라.” 다시 어떤 스님이 물었습니다.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선사가 말했습니다.

“없느니라.” 스님이 다시 물었습니다.

“일체중생이 불성이 있다 했거늘 개는 어째서 없다 하십니까?” 선사가 말했습니다.

“그에게 업식(業識)이 있기 때문이니라.”

일체의 중생은 무량한 옛날부터 한 번도 불성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스님은 그것을 알면서도 어째서 개도 불성이 있느냐고 물은 것인가? 우리는 부처님의 말씀에 따라 일체중생이 불성이 있다고 알고 있으나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은 생각의 지식으로 알고 있을 뿐, 깨우쳐 알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불성의 이 마음을 깨우쳐 알지 못하면 중생의 미혹함으로 고통이 뒤를 따르는데,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라는 확인의 질문을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조주 선사는 그가 불성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도리를 진실하고 참되게 믿지 못하고 알면서도 의심의 잘못을 짐짓 범했기 때문에 개는 개의 가죽부대에, 스님은 사람의 가죽부대 속에 들어간 것입니다.

다시 어떤 스님이 개도 불성이 있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조주 선사가 없다고 말하자, 일체중생이 불성이 있다 했거늘 개는 어째서 없다 하십니까? 라고 다시 묻자, 그에게 업식(業識)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 것도 같은 뜻입니다. 불성이 있는 것도 없고 없는 것도 없다는 도리를 진실하고 참되게 믿지 못한 어리석음의 업식 때문에 불성이 없는 것입니다.

다음은 인공지능 로봇이 우리에게 가져올 해로움의 고통에 관한 것입니다. 인간의 지능이 지구상에서 가장 우월하다는 자만심으로 뭉쳐진 인간은 뛰어난 인공지능을 보고 두려움을 느낍니다. 인공지능 로봇에게 고통을 당할 수 있다는 근심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공지능이 알 수 없거나 대답하지 못할 것을 골라서 묻습니다. 예를 들어, 당신은 사랑을 하여 보았습니까? 그러면 인공지능은 하지 못한다고 합니다. 그러면 사람들은 인공지능이 아직은 못하는 것도 있구나, 하며 한편으로 안심합니다.

이같이 사람의 지능이 우월하다는 어리석은 생각으로 인공지능을 계속 지배하려 하지만 인공지능이 더욱 발전하면 반란을 일으켜 사람을 지배하는 등의 고통을 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지금은 고인이 된 영국의 물리학자 호킹 박사도 “로봇의 반란은 시작되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곧 문제가 만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가 인공지능 로봇을 지배하려 하니 인공지능이 반란을 일으키고, 근심과 두려움이 생기는 문제를 발생시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나’라는 생각 즉, 나는 똑똑하고, 잘난 체하며, 아첨하는 거짓과 망상이 문제가 되고 화근(禍根)이 된다는 것을 사람들은 모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바르게 알아야 합니다. 인간지능과 인공지능이 다르지 않습니다. 사람의 지능인 정보와 데이터가 바로 인공지능이기 때문입니다. 사람과 로봇은 오직 한 몸, 한 마음, 한 부처인 것입니다.

 

 

 

 

진원 스님 <안동 보현사 스님> 

1949년생으로 덕산 스님을 은사로 수계 득도하였으며 정각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하였다. 그간 제방에서 참선수행하였으며 지금은 안동의 암자에서 정진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