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간에 말했습니다. 나는 똑똑하고 잘난 체하며 뽐내며 아첨 거짓 망상의 이 몸뚱이를 지탱하기 위해서 더 잘 먹고 많이 먹고 편안하고 즐거움을 위해서 천산갑과 박쥐를 취했더니 코로나19라는 무서운 유행성 질병의 고통을 받았다고 하였습니다. 또한 자연을 낭비하고 파괴한 대가로 극심한 더위와 혹독한 추위 몰아치는 태풍과 폭우와 폭설이 주는 자연재해의 고통을 얻고 있으며, 이 육신의 편안함을 위해 만든 기구가 도리어 육신에게 고통을 더해주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이와같이 모순되고 어리석은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마하반야 바라밀다라고 하였습니다. ‘마하반야’는 이 몸뚱이와 천산갑과 박쥐 그리고 코로나19와 혹독한 더위와 추위, 태풍과 폭우와 폭설의 자연재해와 일반재해의 원인이 되는 문명의 모든 기구가 공(空)하다는 뜻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매우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공하다, 있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은 이 몸뚱이와 천산갑과 박쥐 그리고 코로나19와 혹독한 더위와 추위, 태풍과 폭우와 폭설의 자연재해와 일반재해의 원인이 되는 문명의 모든 기구가 공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이 아니고, 똑똑하고 잘난 체하며 뽐내며 아첨 거짓으로 일관된 허망한 나의 욕망에 부합하면 좋아하고, 부합하지 않으면 싫어하는 모순되고 어리석은 생각이 바로 공(空)하므로 있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을 세심하게 살펴야 합니다. 왜냐하면 이 몸뚱이와 천산갑과 박쥐는 좋은 것이고, 코로나19와 태풍과 같은 모든 자연재해와 핵 폐수와 같은 모든 일반재해는 싫은 것이다, 라는 일방적이고 자의적인 망령된 욕망으로 잘못 보고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는 똑똑하고 잘난 체하며 뽐내고 아첨하는 거짓의 욕망으로 예쁘고 좋은 것과 밉고 싫은 것으로 무수히 가르고 분별하지만 본래 우주세계의 일체 존재는 우리의 망령된 생각과 달리 그대로 진실이 각기 나타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다만 진실을 외면한 좋아하고 싫어하는 우리의 어리석은 욕망으로 바르게 보고 알지 못하는 것이 모든 문제의 발단이고 원인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마하반야’는 이 몸뚱이와 천산갑과 박쥐, 모든 자연재해 일반재해 등 모든 것을 나는 똑똑하다고 잘난 체하며 뽐내고 아첨하는 망상에 어울리면 좋아하고, 어울리지 않으면 싫어하는 욕망 욕심이 공하여 있는 것이 아니다 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주세계의 일체 존재를 바르게 알지 못하는 어리석은 무지(無智)가 바로 공하기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닌 것입니다.

이와 같이 올바르게 알아서 일체 존재가 오직 이 마음이라고 간절한 믿음을 가지면 지금까지 끝없이 타오르던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욕심의 번뇌 망상이 그만 딱 멈추게 되는데, 모든 욕망이 멈추면 비로소 이 마음을 깨치게 됩니다. 이렇게 이 마음을 깨치면 나는 잘난 체하고 뽐내고 남은 어리석다, 하여 경시하는 온갖 욕심의 번뇌 망상이 영원히 일어나지 않게 됩니다. 욕망 욕심이 다시는 생기지 않는 것이 바로 깨달음입니다. 따라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욕망이 없는 이 마음이 바로 이 몸뚱이 천산갑 박쥐이고, 모든 자연재해 일반재해이며, 여당의 대통령과 야당의 대표 등 우주세계의 일체 존재입니다. 이것을 없는 것도 아닌 ‘바라밀다’ 라고 합니다.

어느 목사님이 카톡을 보내왔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며 우리를 위하여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십자가에 피 흘리게 하셨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사랑 때문에 우리는 두렵지 않으며, 언제나 나와 동행하시고 늘 위로해 주시는 주님의 참사랑이 우리의 삶에 함께하시기에 두렵지 않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목사님의 말씀처럼 예수님의 사랑이 나와 동행하고 함께하시므로 우리는 항상 두렵지 않음을 유지할 수 있느냐가 관건입니다.

하나님은 어느 곳에 계시고, 부처님은 어디에 계시는가? 하나님과 부처님은 저 높은 하늘에 계시는가? 우리들의 마음속에 계시는가? 하나님과 부처님은 자신이 스스로 홀로 있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악마로 인하여 있고, 부처님은 마귀로 인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악마와 마귀가 없다면 하나님과 부처님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 세상에 악마와 마귀가 없다면 홀로 있는 하나님과 부처님 또한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부처님은 스스로 있지 못하고 악마와 마귀로 인하여 있으므로 있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부처님은 스스로 없지 못하고 악마와 마귀가 없을 때 없을 수 있으므로 하나님과 부처는 없는 것도 아닙니다. 악마와 마귀도 이와 같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닙니다.

하나님과 부처님은 사랑하고 좋아하는 욕망이고, 악마와 마귀는 미워하고 싫어하는 욕망입니다. 사랑하고 미워하는 욕망이 멈추면, 사랑하는 하나님 부처님과 미워하는 악마와 마귀가 한 몸, 한 마음으로 융합 융통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악마와 마귀를 다시는 찾을 수 없는 것이 두려움에서 영원히 벗어나는 길입니다.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에서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 깊은 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五蘊)이 공한 것을 비추어 보고 모든 재앙을 건너갔다고 하였습니다. 오온이란, 색(色) 수(受) 상(想) 행(行) 식(識)으로서 우주세계의 일체 존재를 말합니다. 그렇다면 관자재보살이 어떻게 바라밀다 행하여 모든 재앙에서 벗어날 수 있었는가?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이 마음의 마하반야 바라밀다를 행했기 때문에 모든 재앙의 고통을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관자재보살은 우주세계의 모든 중생들을 대할 때, 나는 똑똑하다고 잘난 체하며 뽐내고, 너는 어리석다고 경시하는 거짓의 욕망이 없었기 때문에 이 마음을 깨달아 모든 재앙을 건너갔습니다.

또한 관자재보살은 우리처럼 이 몸뚱이와 천산갑과 박쥐를 좋아하지 않았고, 코로나19와 자연재해와 일반재해를 싫어하지도 않았습니다. 우리처럼 여당 대통령과 야당 대표를 싫어하지도 좋아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예쁜 사람 미운 사람 구별 없이 모두 고통의 재앙에서 벗어나게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지금 미운 사람 예쁜 사람 간택 없이 모두를 괴로움의 재앙에서 벗어나게 하겠다는 염원을 반드시 지녀야 합니다.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은 보는 것이 자유자재하다 하여 관자재라고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보는 것이 자유자재하게 보는 것인가? 우리은 여당 대통령과 야당 대표를 보면서 싫어하고 좋아하는 망령된 생각을 일으키고, 저것은 예쁘고 저것은 밉다 하며, 있다 없다, 멀다 가깝다 등등의 티끌 수와 같은 분별의 욕망을 일으킵니다. 그래서 좋아하는 것은 보려고 하지만 싫어하는 것은 안 보려 하기때문에 보는 것이 자유자재하지 못하고 지극히 협소할 뿐입니다.

그러나 관자재보살은 이 마음을 깨쳐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욕망을 완전히 여의었으므로 우주세계의 일체 존재를 오직 이 마음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의 티끌도 이 마음이고, 하나의 티끌이 모인 우주세계의 전체 티끌도 이 마음인 것을 잘 알기 때문에 하나의 티끌을 보듯이 우주세계 전체를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관자재보살은 보는 것 외에 우주세계의 전체 모든 소리를 빠짐없이 들을 수 있고, 허리를 한 번 구부리는 시간에 저 우주세계의 끝까지도 갈 수 있으며, 일체 중생의 마음도 알 수 있고, 일체 중생의 전생과 과거도 알 수 있으며, 모든 번뇌의 욕망을 끊어 생사윤회를 영원히 벗어난 누진통(漏盡通)을 얻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도 모든 번뇌의 욕심을 여의고 이 마음을 깨치면 지금 관자재보살이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모든 망상의 욕심을 여읠 수 있는가? 관자재보살은 관세음보살의 다른 이름입니다.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의 관세음은 소리를 본다는 뜻입니다. 소리는 귀로 듣는 것인데 어찌 볼 수 있는가? 돌과 나무와 스마트폰과 같이 정이 없는 무정(無情) 중생의 설법을 눈으로 들은 동산 스님의 행적을 다음 시간에 살펴보겠습니다.

 

진원 스님 <안동 보현사 스님> 

1949년생으로 덕산 스님을 은사로 수계 득도하였으며 정각 스님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하였다. 그간 제방에서 참선수행하였으며 지금은 안동의 암자에서 정진중이다.